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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본문: 마태복음 4:23-5;1절

peterpa 2008. 4. 26. 15:07

성경본문: 마태복음 4:23-5;1절

설교제목: 무리를 떠나 제자로의 삶으로

 


   오늘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하신 사역이 잘 요약되어진 본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이 뭔가 이익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문제, 자신의 병 고치는 치료사역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뭔가 신비한 쪽으로 관심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허다한 무리-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에 예수님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첫 번째 반응,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45절에서도 예수님의 동일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사건 이후에 서둘러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타고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반응에 관심이 없고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헌신하고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누군가 챙겨서 칭찬해 주길 바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된 성품 안에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얼마만큼 성장해 있으십니까?

   왜 우리가 그런 것에 흔들리거나 연연해서는 안되는가? 사람들의 평가는 허무하기 그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러다가도 한번만 실수해도 하늘에 띄웠다가 땅에 떨어뜨리듯한 상처를 던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칭찬 듣기를 기뻐하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의 무리가 따르는 것을 보신 예수님의 반응.

두 번째,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두 부류로 구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무리’이고 또 한부류는 ‘제자’입니다.

   기적과 신비, 세상적인 복을 따르는 사람들을 무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산에까지 따라간 자들은 제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5절-27절에도 보시면 무리와 제자를 정확히 구분하십니다.

[다같이 누가복음 14;24-27절. 그리고 33절을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25),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26),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


   자! 여러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무리와 제자를 구분 짓는 것, 그 차이를 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댓가지불”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오고 주님 따라다니고, 병고치고 부자되고, 자식 잘되는 것 좋아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 믿기로 작정하고 결단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성장되기를 원합니다. 부흥을 경험하기를 원하고 축복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댓가는 지불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10년이상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훈련받고 성경을 일기 보다는, 어떤 축복 대성회(?), 무슨 신유 은사집회(?) 그런 것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도 한방에 받아보자는 것입니다. 땀 흘리지 않고, 시간들이지 않고 몸부림칠 것 없이 ‘모’ 아니면 ‘도’라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불한당- 아니 不에 땀한자. 땀 안흘리고 남의 것 먹으려는 무리. 자기 것 하나도 포기안하고 다 챙겨놓고 남의 것을 먹으려고 하는 인간들, 이것이 바로 불한당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바로 위에 18절-22절을 보시면, 제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무리와 다른 점이 보이십니까? 19절에 주님이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는 두가지로 번역하는데, 하나는 "Come, follow me"(NIV). 그리고 “Come, be my disciples" 다시 말해서 ‘나의 제자가 되라!’ 이 말은 ‘나를 따라 오너라!’와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그 명령에 어떻게 합니까? 20절에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 자기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하는 것마저도 포기하고 따라 갔습니다.

   22절에는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전에는 가장 소중한 것들입니다. 재산 목록 1호! 내게 꼭 필요한 중요한 것들! 그러나 이제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이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을 보시면 기생 라합이 구원을 얻는 기록이 기록되어 있는데, 기생 라합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 그의 여관, 친구, 도시 모든 기득권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과감히 버리기로 결단하고 그 여리고를 떠나기로 결단하고 이스라엘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무리와 제자의 차이를 내는 것 또 한가지.

  무리가 자기 중심적이라면 제자는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무리는 자신의 유익, 내 가족, 내 돈을 위해서 예수님,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삽니다. 한국교회는 입으로만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무리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없이 살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갖가지 부정과 사기,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이름까지 동원하고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주의 이름이 짓밟히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내가 과연 무리에 속하는가? 제자에 속하는가? 내가 과연 시련이 왔을때 제자로 검증될 수 있는가? 내가 과연 나를 희생해야 하고 자존심을 구겨야 할때 예수를 위해서 기꺼이 댓가를 지불할 수 있는가?

  여러분! 누가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복 받는다고 말합니까? 그래요 그것까지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쳐요. 그러면 이 땅에서 고통 당하면 저주 받은 인생입니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예수 믿어서 신세 망친 인생입니까? 그 좋은 학벌, 그 좋은 집안, 창창한 앞날이 보장되어진 신분. 그런데 어느날 예수 만나고 나서 그런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고생하고 감옥에 갇히고, 강도와 풍랑과 태장을 당해가면서 살다가 죽어간 인생 완전히 인생 꼬인 것 아닙니까?

   제자의 삶은 이 땅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어려움을 사서 당하는 삶이 제자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무리로 남아서 살지 뭣하러 제자가 되겠는가?

여러분! 무리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받을 수 없는 제자들만이 받고 경험하는 특별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경험하고 살도록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시면 무리를 향하여 팔복을 설교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9:1절에 보시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자.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는 자! 하나님의 나라를 권세와 능력으로 경험하고 사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은혜! 이것이 제자들이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권세라는 것은,  권세와 능력이라는 말인데, 권세는 무엇이고 능력은 무엇입니까?

  쉽게 설명하면 이것입니다.

  권세는, 경찰이 신호하면 꼼짝없이 그 권세에 차들이 서게 되는 권세.

  능력은, 신호해도 도망가는 자를 직접 잡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한국 경찰은 차가 도망가도 뒤에서 손가락질만 해대고 폼만 잡지만, 미국 경찰은 헬기를 띄우고 고속도로를 다 차단해서 반드시 잡아냅니다. 그래서 미국 경찰은 그 권위가 대단하다)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제자에게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까? 용서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까? 헌신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까?

   오늘날 부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라는 이름, 권세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이 이유입니다. 무리의 자리에 있으면 권세와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두 번째, 제자들이 받는 특별한 축복.

  하나님의 주시는 평강과 하나님을 아는 기쁨입니다.

   기적의 비밀을 아는 자가 누리는 평강과 기쁨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무리는 포도주를 먹으면서도 영문을 모르고 있었지만 물 떠온 하인들은 알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무리의 자리에 있으면 도저히 모르는 것,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40년간 부부싸움을 한번도 안한 부부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 비결을 너무나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비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결혼하게 되어서 신혼 여행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신혼 여행에 가서 말을 타는데, 그 말이 막 달리다가 남편을 땅에 떨어뜨려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미소를 짓고 일어서더니 말에게 가서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그리고 다시 남편이 말을 타고 갑니다. 그런데 이 말이 다시 남편을 땅에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말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이 남편이 또 미소를 지으면서 말에게 “두번”, 그리고 다시 말을 타는 것입니다. 와! 정말 마음이 바다 같이 넓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말이 다시 남편을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말할 겨를도 없이 남편이 총을 꺼내서 말을 쏴 죽여 버렸습니다. 아내가 어떻게 그렇게 죽여 버릴 수가 있느냐고 당신 정말 그런 사람이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미소를 지으면서 부인을 향해서 “한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 부부는 평생 부부싸움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평강이 아닙니다. 기쁨이 아닙니다.


   2000년 7월 30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다가, 소주 5병을 마신 어떤 사람의 차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해서 전신에 화상을 입고 도저히 살 가망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던 ‘이지선’ 자매, 이화여대 4학년으로 꿈 많던 그녀가 7개월간 입원하고 11차례의 수술을 받고 3년의 치료기간을 지났지만, 이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간 곳이 없고, 괴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합니다. 지금 미국에 가있는데, “나는 미국에 가서 제 얼굴을 고칠 수 있다해도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남들이 괴물이라고 말해도, 지선 자매 때문에 자살하지 않고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게 된 청소년이 수십 수백명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들만이 누리는 평안의 축복입니다. 권세입니다.


   제자가 받는 축복 세 번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형통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잘되고 편하게 살고, 내가 원하는 것은 척척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성경은 결코 그렇게 형통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형통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39:2-5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2),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3),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4),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5).”


   사람들은 형통이라는 것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찬송가 434장을 굉장히 좋아하지요? 그러나 그 본 뜻을 안다면, 그래도 이 찬송을 계속 좋아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찬송434장)


   요셉이 형통한 자 입니까? 인생 꼬인 사람입니까?

   요셉은 고통과 환란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애굽에 팔려가서 주인집 여인의 유혹에 대면하지만 정말 어려운 유혹이었지만, 외로운 이국생활의 외로움과 이제 18살이 되는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에 거의 불가능한 반응을 보이면서 유혹을 이겨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적인 신앙인의 반응을 보인 댓가는 강간 미수범으로 감옥에 갇히는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 제자의 삶과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형통한 삶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형통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제자들이 경험하는 형통은 어떤 것인가?


  첫째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 내재하심을 경험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2절과 3절, 4절 모두에 나타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2절---“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3절---“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그러니까 형통이란, 하나님이 얼마나 그의 인생에 개입하시느냐?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는 외모를 중시하는, 건물도 인테리어를 중시하는 세상입니다. 순수미술보다는 응용미술이 인기가 있는 시대입니다. 강도도 얼굴만 예쁘면 인터넷카페가 생기고 얼짱 강도 팬이 생기는 시대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제자는, 너무 껍데기, 외식적인, 세상적인 형통과 원리를 부러워하거나  따르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렇지 않게 죄지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렇게나 나를 포기하고 비관하고 좌절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말한 것처럼, “새가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어쩔수 없지만 내 머리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 책임이다” - 내 머릿속에 불평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말로 나가거나 남에게 짜증을 내면 그것은 바로 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고 나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그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경험하기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진정한 형통의 결과, 제자들의 삶의 모습은 환경을 초월하게 하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빌립보서 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을 우리는 여기 저기 갖다 붙이지요? 식당에도 붙어있고, 자주 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문맥의 의미는 11-12절을 보아야 이해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1-12절을 함께 찾아서 읽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1),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


   그렇습니다. 환경이 바뀌기에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을 가지고 초월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능력은 어떤 월등함이 아니라, 초월성입니다.

   교회마저도 잘난 놈, 똑똑한 놈, 1등 하는 놈이 우대 받으면 그게 도대체 말이 되겠습니까? 때로는 쪼다 같고 힘없고 못난 자가 교회에서 예수 만나고 다시 힘을 얻어서 세상으로 뛰어 들어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까?

   교회가 숫자가 많으면, 교회가 사이즈가 크면 부흥입니까? 사람이 덩치가 크고 비만하다고 건강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이 내재하심이 있어야 건강한 것이고 부흥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통을 추구하는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성령 받고 설교하니까 한번 설교로 3000명이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 받고 설교했더니 3000개의 돌이 날아와서 맞아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실패했습니까? 형통한 삶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제자는, 우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감옥안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란과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도 평강과 축복을 경험하는 감격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문제, 인간사의 문제, 어떤 것도 그를 흔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495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마지막으로, 진정한 형통의 삶은 그 형통의 결과가 내 주위에 유익한 결과로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 창세기 39;5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세상 사람의 복은 내가 그 복을 다 받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의 복은 복의 결과가 주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설렁탕 집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항상 목사님이 심방을 가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설렁탕 한 그릇을 끓여도 주님 대접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그는 늘 특상품의 재료와 조미료를 쓰면서 장사를 하는데, 어느 날은 가마솥에 24시간을 끓였는데도, 국물 색깔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래처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실수로 잘못 배달되었다고 하면서, “비결을 가르쳐 줄테니 오늘 하루만 커피 프림을 넣으라고, 그러면 국물이 뽀얗게 된다고, 다른 집은 다 그렇게 장사한다”고 했습니다.

   고민하던 설렁탕집 주인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하루 문을 닫았습니다. “오늘은 설렁탕 재료가 좋지 않아 하루 휴업합니다”

§. 한 마부가 예수를 믿고 왕손에게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왕손이 말하기를 “너 같은 놈이 예수 믿으면 왕족이 된다더냐?” 자존심을 짓밟는 말이었지만, 마부는 공손히 대답했습니다. “저 같은 놈이 예수를 믿으면 주어진 마부 노릇을 더 잘해야 합지요”


   오늘날 문제는 마부에서 왕족되고 가난한자는 다 벼락부자 되는 것이 예수 믿어 복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무리를 떠나 제자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내가 누리고 대우받고 인정받는 것, 기득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나가는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즐기던 모든 악한 행실과 못된 근성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형통의 삶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출처 : 오동석목사
글쓴이 : 오동석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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