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하나님의 비전!(겔37:1-10)
어느 날 늦은 저녁 거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를 생각해 봅시다. 그 바다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배 한 척이 있습니다. 그 배의 선장은 풍랑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살아 보겠노라고 아우성입니다. 서로가 자기 나름대로의 경험이나 어깨 넘어 배운 지식으로 그 배의 키를 만집니다. 우격다짐으로 운전대를 만져보지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죽게 생겼으니 폭언과 거친 행동들이 행해집니다. 선장이 없는 그 배는 너무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나마 배가 떠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비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이제는 영하의 기온입니다. 얼마나 그 밤이 길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 긴 밤이 지났어도 육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가며 한 사람 한 사람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더 이상 소리 지를 힘도 없어지지만 육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탈진하여 다 쓰러질 지경입니다. 키도 놓아 버려 배는 표류 중입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적어도 이 교회는 위와 같은 시간들을 보냈었습니다. 그 시기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를 지키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그 어려움 속에 여러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이 복잡한 교회의 키를 담임목사님에게 맡겼습니다. 여러분만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주서문교회를 담임목사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오셔서 3년째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계시기 전에 우리 교회는 장년 1000명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상처의 아픔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오시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문 듣고 교회를 찾아옵니다. 행복하다는 표현을 합니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한 해 한 해를 거듭해 가며 교회는 부흥하고 있습니다. 2부 예배도 100여명 이상이 늘었고, 3부 예배는 자리가 부족합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이 문제 저 문제가 터져 있어도 우리 교회는 부흥하고 있습니다.
망망대해에 풍랑을 만난 배 안의 승객들이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처럼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1. 부흥은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유대민족이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 속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하나님께선 에스겔에게 역사하시더니, 그를 해골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다. 그곳을 내려다 보니 골짜기 지면에 마른 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위에서 보았을 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그는 표현하기를 뼈가 심히 말랐더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에 붙들려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참으로 암울해 있었습니다. 비전도 희망도 전혀 보이지 않는 환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실상을 보게 만든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상은 죽어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경은 죽어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굶주려 있었고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같이 영적으로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상태는 말라 비틀어져 있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형태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의 실상을 보게했던 하나님께선, 3절에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에스겔 선지자는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이 골짜기의 모습을 본 에스겔은 자신이 없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은 암울과 절망과 죽음과 낙망 뿐이었습니다. 희망은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꽉꽉 막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해도 아무리 애를 써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심각하다고 보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내가 볼 때는 도저히 답이 없어 보입니다. 주께서나 아시지요? 에스겔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네’라고, ‘아멘’이라고 바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를 바라보니 오랜 전통과 관습과 형식에 얽매여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고, 너무도 오랜 세월 교회문제로 이리 지치고 저리 지쳐 무기력해 보인다 이겁니다. 이 장로는 저 권사는 이 집사는 저 성도는 도저히 변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않되겠다 이겁니다.
우리 가정을 볼 때, 내 남편을 위해 10년간 20년간 아무리 기도해도 더 완악해져만 가고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겁니다. 한 번 낙담에 빠진 자녀가 도저히 재기 못하더라 이겁니다. 병들어 있는 내 아내가 병들어 있는 내 부모가 전혀 낳을 것 같지 않는다 이겁니다. 가정에 우환은 엎친데 덮치고 한 겹, 두 겹도 버거운데 세 겹, 네 겹 쉴새 없이 닥쳐온다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말라버린 우리 교회의 뼈와 형체도 분간 어렵게 부수어져 버린 우리 성도들의 뼈를 구체적으로 보이시며 이 뼈들이 살아나겠느냐? 여러분에게 질문하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스겔과 같이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하고 그 힘없이 대답하기 십상입니다. 쉽게 예라, 쉽게 아멘이라 못하기 십상이라 이겁니다.
아니 무슨 말이냐고 당치도 않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할 것이다.
현 상황에선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고 폐쇄적이고, 절망적인 대답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괜찮습니까? 우선 우리 실상에 대해 말해야 겠지요? 정말 나는 멀쩡합니까? 정말 나의 영혼은 아무 이상이 없습니까? 목사 너의 영혼은 참으로 살아 있느냐? 라고 물으시면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목사의 죽어있는 실상을 낱낱이 보여주신다면 너무 부끄럽습니다. 머리들기가 힘이 듭니다. 목사란 명함도 꺼내기 힘들어 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열심, 온갖 죄악에 오픈되어 물들어 있는 내 습관과 성격과 행동, 내 마음과 내 생각 저 밑에 깔려 있는 저 죄악덩어리는 나를 절망케 만듭니다.
아무 힘없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죽어져 가고 있는 내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시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물으십니다. 내가 살아나겠느냐? 네 가정이 살아나겠느냐? 네 교회가 살아나겠느냐? 우리도 희미하게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분명 우리의 영적 실태와 실상을 영적 현주소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 싫어해도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다시 살아나는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5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절입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실상과 우리들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현주소가 어떤지 분명히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파악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비전도 보여주십니다.
억지로 우리들의 실체를 보게 하신 하나님께서 비전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죽어 가던 것이 소생하는 것‘ 혹은 '되살림', ’재생‘을 뜻합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말은 부흥에 대한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우리 영혼의 부흥은, 우리 가정의 부흥은, 우리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비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실상만 파악한 채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 무책임한 분이 아니십니다. 부흥비전을 보여주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부흥이란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흥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확실히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여름 가뭄에 바짝 타들어간 밭작물과 같은 내 영혼에 ‘니가 살리라!’하며 외쳐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냉냉한 우리 성도를 향해 ‘당신이 살아날 것이다!’하며 외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다시금 부흥케 되는 비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우리 가정 공동체가 살아나는, 부흥케 되는 비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어있는 우리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말입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우리 영혼을 다시금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케 되는 비전을 보여주시고 다시금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어떻습니까?
즉 내 영혼의 실상과 우리들의 메말라 있는 모습을 보일 뿐만 아니라 다시금 살아나는 비전을 보여주시면서 살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아멘!’ 하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서문은 다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 가정과 직장은 다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우리 아내와 우리 자녀와 부모는 다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우리 당회와 제직은 다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우리 전도회와 우리 교구와 우리 부서는 살아날 줄 믿습니다. 아멘? 아멘!
그렇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아멘? 아멘!
옆사람에게 말해봅시다. 당신의 영혼은 부흥될 줄 믿습니다. 당신의 가정은 회복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부흥될 줄 믿습니다. 아멘!!!
부흥은 하나님의 비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흥’ 찬양하시겠습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용서 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 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 라 이 땅에 임 하소서.
2.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부흥은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것입니다. 오늘 마른 뼈들을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살리신 분은 분명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사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저 쓰러져 있으며 도움만을 기다리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에스겔을 부르셔서 그를 골짜기로 데리고 가시고 부흥비전을 보여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요 비전이기에 이 부흥은 확실한 것입니다. 부흥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우리의 뛰어난 전술과 전략에서, 나의 지혜와 경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기획품이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통해 일어납니다.
내가 부흥한다함은 내 심령에 성령의 충만함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움직이고 성령에 의해 행동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을 “하나님의 성령의 흘러넘침이며, 오순절의 한 반복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부흥의 때와 시기는 순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성령충만하지 않은 채, 내 자신이 부흥되지 않은 채 내 입을 열고, 내 생각을 주장하고, 내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부흥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알면 우리는 좀 더 겸손해 집니다. 우리는 좀 더 자중하게 됩니다. 신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이루시는 주체이신데 내가 할려고 하니까, 내가 해결해 보려고 하니까,
분명 부흥을 원하지만 결과가 이상한 것입니다. 부흥을 원하는데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분명 문제를 보았습니다. 너무도 확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혼자서 안되겠다 싶어 인터넷과 신문에 글을 써봅니다. 여러 사람들의 생각들을 모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든가요? 항상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할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내 이름 석자를 내 세우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부흥비전을 보여주시고 하나님께서 부흥비전을 주십니다. 내가 아닙니다.
자꾸 내 자신을 내세우는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신 스스로가 영웅심에 이끌려서도 안됩니다. 문제가 보여도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보여도 우리 하나님께 엎드리시고 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보여도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도 교회에 덕이 안되고 교회를 혼란케 하면 그 하고 싶은 말이 목을 타고 턱까지 와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알려야겠다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려고 하다가도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닙니다. 글이라고 다 글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란 명목을 내세워도 그 글과 말이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이라면 큰 문제 입니다.
인터넷을 통한 악성 댓글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않습니까? 물론 그 재미가 솔솔하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이 동조하는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나의 댓글에 또 다른 댓글을 달았다고 기고만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댓글을 달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댓글을 달아도 예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컴퓨터가 인격이 없다고 해도 그 내용이 사람들을 향하고 있을 때는 철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비판적이고 비난적인 악성 댓글에 힘겨워 자살한 연예인도 있습니다. 오직이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요?
악성루머와 악의적 표현으로 자살한 군인이나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요즘 그 문제에 법적제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크게 일고 있습니다. 자살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자살까지 몰아간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악성댓글과 악성루머가 상대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주는지에 대해 정신과 의사에게 자문해 보지 않아도 비전문가도 충분히 압니다. 의혹적 발언 하나에, 상대를 치는 한 마디에 그 상대는 죽을 맛입니다. 견디기 힘듭니다.
너무 괴로워 밤잠을 설치며 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죄악입니다. 간접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확한 근거나 증거도 없이 의혹을 부풀려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는 정치에 있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모두가 다 내가 해 볼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부흥되지 않고 내가 하나님 앞에 회복되지 않고 내가 해 볼려고 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부흥의 사람은, 회복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다릅니다.
나를 부흥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 공동체를 부흥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내가 부흥의 사람인가? 내가 회복의 사람인가?를 철저히 따져 봐야 합니다.
3. 이 부흥케 만드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극적이고 희미한 대답을 하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선지자는 인간의 생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대언을 했습니다.
그 대답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시체더미 그것도 말라 비틀어진 뼈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분명히 변화가 있었습니다.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마른 뼈에 뭔가 변화가 왔는데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에 생명력이 없는 영혼에 생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역시 생기를 향하여 그 뼈들에게 불어 살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에스겔이 전할 때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언제 뼈들이 움직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라 비틀어진 마른 뼈에 전해지자 뼈들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변화는 보였지만 생기가 없는 마른 뼈에 생기가 불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뼈들이 살아났습니다.
이사야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와서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우리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회복시키고 우리를 살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시금 살아나고 회복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 말씀인데 왜 우리가 말씀에 소극적이겠습니까?
시119,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시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혼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임해야 우리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데 있습니다. 내가 읽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고 내가 들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까? 그건 내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죽어있던 저 뼈들에게 말씀이 들려질 때 변화가 일어나고,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내 심령에 들려질 때에 내 뼈들이 움직여서 들어맞고 내 힘줄이 생기고 살이 돋고 내 가죽이 덮이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는 죽은 심령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회복의 역사, 부흥의 역사, 살아나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4. 이 회복의 역사는 회개를 통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그 말씀에 따라 우리의 삶을 조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조명되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조명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114년 동안의 서문의 아픔을 어찌 다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신년부흥회가 열리고 전북기독신문에 실린 타이틀이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이번 부흥회 때 은혜 받으시고 성도 앞에 고백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신문사는 이 내용과 함께 장로님들이 강단 앞으로 나와 함께 울며 기도하는 장면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사진 한 장으로 그 때 그 감동을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의 고백이 있던 그 순간 난 로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의 고백이 터지자마자 내 가슴이 뛰고 있었고, 내 눈에서 눈물이 맺혔습니다. 찬양할 때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으로 모든 성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누구의 각본이었습니까? 누구의 연출이였습니까? 소강석 목사님이 매 집회 때 마다 이끌어 내는 연출이었습니까? 하지만 분명히 기억되는 것은 소강석 목사님은 목사님에게 먼저 공개적으로 회개하면 성도들도 회개할 것이다라는 개인적인 언질도 없었고, 그냥 그렇게 끝날 분위기였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입니다. 전혀 계획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도중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목사님의 마음을 여신 것입니다. ‘네가 과연 지난 서문의 성도들의 고통을 100%로 이해했느냐?“ 목사님의 대답은 서문의 아픔을 이해해보겠다고 했고, 최선을 다해 목회하시면서, 그야말로 건강에 물의가 오셔도 목회하셨지만 가슴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성도들의 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때 한 집사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분의 마음도 성령님께서 여신 것입니다. 또한 장로님들의 그 뜨거운 회개의 기도 역시 성령님께서 그 마음 문을 여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닫혔던 서문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말라 비틀어진 우리 서문의 마음을 여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 각본이 있었습니다. 연출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각본이 아니라, 사람의 연출이 아니라 아직도 잠자고 있는 전주서문을 사랑하시는 성령님의 각본과 성령님의 연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연출에 담임목사님도, 장로님들도, 성도님들도 캐스팅된 것 뿐입니다.
이 회개의 운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 회개의 운동이 대리만족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 회개의 운동은 바로 나에게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교회문제가 일어난 이후 적어도 지난 6년간 서문은 정상적이었습니까?
변하지 않고 있었던 반목과 질시와 비난과 비판과 폭언과 저주와 미움과 다툼과 분쟁과 싸움이 전주서문이 정상적이었습니까?
제가 6년 동안 지켜 본 서문은 너무도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것이고, 너무도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 주장이 있어도 교회 전체 질서에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면 자제함이 마땅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너무 사나와 보였습니다. 다툼이 있고 언성이 높을 때마다 상대의 눈을 보기가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너무도 정치적이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인지 말씀을 판단하는 것인지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예배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신앙관에 비추어 뭐가 틀린지 들추어내기 바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이 모든 것을 다 뒤로 해야 합니다.
이제 서문에 미움대신 사랑이, 싸움대신 화해가, 거절대신 용서와 용납이, 비난과 비판대신 인정과 배려와 이해가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교회를 생각하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최용덕씨가 작사 작곡한 ‘오늘 나는’이라는 찬양을 하시겠습니다.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우너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 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부흥의 길로 나갈 때 필수코스가 바로 회개입니다.
교회만 그렇습니까? 지금 남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 자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삶에 변화가 없다면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은 그렇게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숱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치 못한 내 자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은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모든 것을 살릴 수 있습니다.
회개는 미사어구가 가득차고, 아름다운 글귀가 아닙니다.
아주 정제되고 깔끔한 원고도 아닙니다. 정열적인 강연도 아닙니다.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하고, 논리정연한 내용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정직한 고백입니다. 진실하고 진솔한 고백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솔한 고백은 모든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진솔한 고백의 회개가 나와야 합니다.
이 회개가 부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4. 하나님 말씀으로 회복된 영혼들이 모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회복된 영혼들에 대해 어떻게 표현합니까?
본문 9절에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에스겔 선지자는 그 명대로 대언 하였더니 10절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생활 속에서 때로 역경과 환난을 당할 때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마른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을 때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고 그곳엔 생기가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가 되었다는 말씀처럼 믿음으로 나아갈 때 큰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큰 군대로 일어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부흥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큰 군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군대를 부르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길 때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죽어져 가는 우리에게 비전을 보여 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심으로 우리를 귀중하게 쓰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시는 성도가 되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오동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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