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리스토텔레스와 물질 세계
- 헬라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384-322BC)에게서 절정에 달함. 그의 저작은 논리학, 심리학, 자연사, 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에 새로운 깊이와 심원함을 갖다 줌.
-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의 궁정의사였던 니코마쿠스의 아들. 대략 367년BC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들어감. 거기에서 347년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남아 있었음. 그러나 그 아카데미의 원장 자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플라톤의 조카이자 상속자인 스퓨시푸스(Speusippus)에게 넘어감.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남. 342년BC에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당시 13살이었던 자기 아들 알렉산더의 가정교사로 삼음.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를 대략 3년 정도 가르침. 355년BC에 뤼케이온(Lyceum 영어로는 ‘라이시엄’이라고 읽음)을 개원함.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라이벌이 됨. 그리고 아카데미의 가장 뛰어난 제자 몇 사람을 받아들임. 아카데미가 수학을 강조한데 비해서, 뤼케이온은 생물학과 학문적/과학적 탐구(연구조사 research)를 강조함. 아리스토텔레스는 큰 도서관을 세우고자 노력. 교육이 지붕이 되어 있는 포르티코(portico = peripatos, 포치, 기둥이 받혀져 있는 현관)에서 이루어짐.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칠 때에 그 현관을 오르락내리락 왔다갔다 하는 버릇이 있어서 ‘페리파테틱’(peripatetic, 소요)이라는 용어가 생겨남.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을 가리킬 때, 소요학파라고 일컫게 됨. 323년BC에 알렉산더가 죽자,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분위기가 일자 제자 몇을 데리고 칼시스(Chalcis)로 가서 거기서 이듬해에 62세로 죽음.
- 초기에는 플라톤을 따라서 대화 형식으로 책을 썼다고 하나, 전해지는 것이 없음. 지금까지 보전되는 논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노트와 학생들을 위해 만든 기록에 토대를 둔 교과서들임.
- 워너 제거(Werner Jaeger)에 따르면 처음에는 플라톤을 열정적으로 따랐다가 결국에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포기한 것으로 봄.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점차적으로 플라톤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다고 봄. 플라톤의 어떤 견해들은 노골적으로 배격함.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철학은 물질적인 실재와 형이상학적인 실재에 대한 좀더 만족스럽고 체계적인 견해들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음.
- 그의 논문 <Topics>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인식을 셋으로 구분. 이론적 지식, 실용적 지식, 생산적 지식. 어떤 주제들이 이 구분들에 해당하는가에 대해 의견을 이리저리 바꾸긴 했지만, 그의 주제분류는 현재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줌.
- 이론적 지식 – 논리학, 형이상학, 수학. 실용적 지식 – 실제 행위를 위해 연구될 수 있는 학문적/과학적 주제들과 윤리학. 생산적 지식 – 수사학과 시. (오늘날의 문학)
- 논리학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후대의 모든 논리학의 토대를 놓음. logic이라는 말은 헬라어 ‘로고스’에서 나왔음. 이성, 담론, 말, 단어라는 뜻. 넓은 의미에서 논리학은 사유와 논증의 구조에 대한 연구임. 이 주제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선호했던 단어는 ‘로직’이 아니라 ‘애널리틱스’ (analytics) 분석학이었음. 이를 모든 지식/인식 분과의 예비 연구로 간주하고 학문의 도구(organon)라고 부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련 저술들에 대한 모음집에 대해 <오르가논>이라는 이름을 붙임.
-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핵심은 그의 삼단논법(연역법) 연구에 있음. 삼단계. 대전제-소전제-결론. 결론은 두 전제들의 진리로부터 나옴. 대개 인용하는 예)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그러나 그 주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관심사는 무엇이 정당한 논리적 연역을 구성하느냐 하는 문제였음.
- 학문의 구조에 대한 논문인 <Posterior Analytics>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분야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모든 분야에 대한 공통적인 방법론을 배격함. 말하자면 기하학 분야의 증명을 산술 분야에 쓸 수 없다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은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범주 착오를 일으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다른 종으로 침범해 넘어가는 것”이라고 일컬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범주(카테고리)를 혼동하는 위험에 대한 의미심장한 경고임.
- 자연학(물리학)과 형이상학
-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저술들은 다수의 물리학 저작들에서부터 동물들의 부분, 운동, 발생에 대한 일련의 논문들에까지 망라되어 있음. 물리학을 다루는 네 개의 주저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에 대한 소크라테스 이전의 개념들과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배격함. 그 대신에 인과 관계(causation 원인작용)에 대한 체계적인 견해를 발전시킴.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그의 형이상학에서 더 발전시킴.
- 형이상학(메타피직스)라는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 사후에 비로소 생겨남. 전승에 의하면, 주전 1세기에 소요학파 철학자 안드로니쿠스 로디우스를 통해서 그 말이 퍼지게 되었다고 함. 안드로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를 쓴 사람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순서대로 모아 놓다가 물리학 다음에 지금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 자료를 놓음으로써 메타-피직스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 물리학 다음으로 연구되어야 할 주제. 또한 물리적 세계를 초월하는 것들에 대한 연구를 말함.
- 간략히 정리하자면, 형이상학에서 세 가지 주제에 주목해야 함. 잠재태(potentiality)와 현실태(actuality), 원인들에 대한 개념, 그리고 부동의 원동자 사상
- 잠재태와 현실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는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이전의 헬라 사상들에서 크게 진보한 것임. 현실태(actuality 헬. 에네르게이아 energeia)는 어떤 것이 다른 것들을 불러낼 수 있거나 불러내어진 존재상태를 말함. 잠재태(potentiality, 헬. 뒤나미스 dynamis)는 변화를 불러오거나 변화되는 힘을 말함. 숲에서 자라나고 있는 나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그 나무는 잠재적으로 집이나 가구가 될 수 있는 잠재태/잠재성을 지니고 있음. 또는 불에 탈 수 있는 화목/땔감이 될 수도 있음. 사람이나 다른 생물들을 포함해서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음. 아동은 잠재적으로 어린이며 부모이며, 실재 현재 부모는 더 이상 아동이 아니지만, 할머니할아버지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음.
- 여기에서 세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음. 첫째, 어떤 물건이나 동물이나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면에서 잠재적이면서 현실적일 수 없다는 것. 나무는 살아 있는 나무일 수도 있고 목재일 수도 있지만, 살아있는 나무이면서 동시에 목재일 수는 없음. 아동은 아동이거나 어른이 되거나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동이면서 어른일 수는 없음. 둘째,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외부의 대행자/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 나무들이 혼자서 저절로 목재가 될 수 없고 집이 될 수 없고, 가구가 될 수 없음. 아동들도 다른 사람들의 돌봄이나 자양분섭취가 없이 어른이 될 수 없음. 생명도 주변 환경의 지원을 받아야 함. 셋째, 잘 관찰해보면, 우리가 지적한 그런 변화들이라는 것이 꼭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나무가 집의 일부가 되느냐, 가구가 되느냐, 종이 펄프가 되느냐, 숲에 그냥 남아 죽고 쓰러져 소멸하게 되느냐하는 것은 인간의 예견을 넘어서는 수많은 요인들에 달려 있다는 것. 그렇지만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이러저러한 변화에서 벗어난 것이 없어서, 만물은 계속해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현실태에서 잠재태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1권에는 플라톤에 이르기까지의 이전의 헬라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음.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전의 개념들을 개선한 것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볼 때는 해결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킴. 각각의 실재하는 물체마다 그에 대응하는 이데아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각 실개체(entity)에 하나의 이데아 이상이 있다는 것인가? 각 사람은 하나의 이데아를 갖는가? 그리고 각 기관에 해당하는 이데아가 따로 있다는 것인가? 이데아들은 실개체들과 별개로 따로 존재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데아들은 실개체들에게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숫자들은 이데아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의 노선에서 이데아론을 하는 대신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인들에 대한 이론(a theory of causes)을 개진함.
-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몇 가지의 다른 원인들의 종류에 따라서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4가지 유형의 원인들을 확인함. 이 원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표적. 첫째 유형의 원인은 질료인(material cause), 그것은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는 물질로 이루어짐. 둘째 유형의 원인은 형상인(formal cause)으로 그 물체가 취하는 형 혹은 본을 말함. 셋째 유형의 원인은 작용인(efficient cause)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작인/대행자를 가리킴. 물건을 만드는 자, 변화를 발생시키는 것. 조각상을 만드는 조각가. 마지막 유형의 원인은 목적인(final cause)으로 무엇인가가 어떤 것을 하는 목적이나 의도를 가리킴. 조깅의 목적인은 건강.
- 부동의 원동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 현실태, 원인 작용(원인관계)에 대한 견해들은 으뜸의 혹은 부동의, 원동자(the Prime, or Unmoved, Mover)론으로 인도함. 무엇인가가 잠재태에서 현실태의 상태로 변화하려면, 변화의 작인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세상에 있는 어느 것도 그 자체가 원인은 아님. 운동을 일으킨 원인은 따로 있다는 것. 모든 운동의 전체 과정에는 모든 원인 작용과 운동의 원천이 되는 최고 운동자, 혹은 부동의 원동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원동자는 다른 모든 유형의 원인들과는 다르다는 것.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은 하나님의 존재를 우주의 원인으로 주장하는 초기 형태의 우주론적 논증에 해당. (우주론적 논증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배울 것임). 그보다는 이 논증에서 네 가지 점에 주목하는 것이 유익할 것.
- 1.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 방법 – 기본적으로 관찰을 한 다음, 합리적인 성찰을 수단으로 해서 역추적해 들어가는 방법. 경험/체험을 비판적으로 숙고한 다음에, 그 경험의 배후에 놓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결론에 도달. 그럼으로써 이 접근방법은 성격상으로 그의 삼단논법 즉 연역의 방법에서 얘기했던 것과 비슷하게 됨. 먼저 관찰할 수 있는 내용에서 시작해서, 직접 관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결론을 연역 도출해 내는 것. 그는 다른 것들의 원인들이 서로 유비성을 띠고 있다고 믿었으며, 부동의 원동자는 우리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일상 경험으로부터 추론하는 원인들에 대한 어떤 유비성을 지닌다고 믿었음.
- 2. 그 논증은 부동의 원동자를 원인작용과 운동의 전제로 상정하고 있음. 부동의 원동자는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아님. 그 원동자는 모든 무한하거나 우유적(遇有的 contingent)인 원인들의 필연적인 근거로서 요청된 것임.
- 3.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은 원인작용과 우유성/우연성(contingency 비필연성)을 포함하고 있음. 우유성이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없는 속성을 가리킴. 유한한 모든 존재들의 특징임.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임.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이차적이거나 중간적인 원인들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임.
- 4.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는 때때로 이야기되듯 정태적(靜態的)인 존재[a static being]가 아님. 부동의 원동자는 스스로의 원인 이외에는 다른 어떤 원인에 의해 움직이지 않음. 그러나 이 말은 부동의 원동자가 무운동을 한다는 말이 아님. 오히려 이 말은 그 부동의 원동자가 세상에서 발견되는 원인들과 작인들과는 다른 종류의 실체(entity)라는 말임. 다른 모든 것들은 다른 것에 의해 야기된 원인들(caused causes)임. 부동의 원동자는 야기되지 않은 원인인 것. 또는 순수 현실태(pure actuality)라고도 말할 수 있음. 부동의 원동자는 무엇으로부터 야기되기를 기다리는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있는 그대로가 현실이며 실질인 것임. 그는 변화되거나 변화받지 않는, 변화의 근원임. “그는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자로서, 영원한 실체이며 현실태이다.”
- 이 점은 하나님의 불변성(the immutability of God)에 대한 논의와 관계가 있음. 이 말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 하나님이 어떤 식으론가 영원히 얼어붙은 무운동성(eternally frozen immobility) 가운데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님. 이 말은 모든 유한한 작인들과 원인들에게 속하는 성장, 감소의 변화에 종속됨이 없이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활동하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독특하다는 뜻.
-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여러 문제가 남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종류의 하나님을 믿었는가? 그의 부동의 원동자는 인격인가?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연관을 맺는가? 그의 물리학 끝에서 하나님(신)을 이렇게 묘사. “첫 원동자는 영원한 운동을 유발시키고 무한 시간대에서 그 운동을 야기시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누어질 수 없고 부분이나 양이 없음이 분명하다.” 부동의 원동자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데미우르고스와 같지 않음. 그는 시간 안에서 창작품을 만드는 장인임. 그러나 부동의 원동자는 세계를 초월하며, 나머지 다른 어떤 존재와는 다른 질서에 속하는 존재임. 이 점에서는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나님이 플라톤의 하나님보다는 성경적인 하나님 개념에 더 부합함.
- 다른 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의 활동(divine activity)이 생각(thought)과 관조(貫照, 觀照 contemplation)로 이루어진다고 얘기. 그의 형이상학에서는 부동의 원동자를 영원한 하늘과 만물의 최종 원인 즉 목적인이라고 봄. (작용인이 아님). 그는 창조보다는 운동에 더 관심. 부동의 원동자는 만물이 그 원동자를 향해 나가도록 소원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서의 목적인임. 만물의 목표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성경 사상과 비교될 수 있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만물의 기원이기도 함. 처음과 끝임.
-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를 ‘제일원리’라고 말하면서 그 원리가 생각을 한다고 여김. 그러므로 그 원리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
- “… 생각은 생각의 대상의 본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한다. 생각은 생각의 대상들에 접촉해서 그 대상들을 생각함으로써 생각의 대상이 된다. 생각의 대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 생각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이 대상을 소유할 때 활발히 작용한다. 그러므로 생각의 대상을 소유한다는 것이 생각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적 요소이다. 그래서 관조의 행위가 가장 유쾌하며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우리 인간은 때때로 들어가는 상태인 좋은/선한 상태에 항상 있다면, 이 사실은 우리 인간의 경이(警異)를 불러 일으킨다. 만일 더 좋은/선한 상태에 있다면, 더 경이를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진정 신은 더 좋은/선한 상태에 있다. 그리고 생명이 또한 신에게 속한다. 생각의 현실태는 생명이기 때문이며, 신이 그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신의 본질적 현실태는 가장 선하고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신은 영원하며 가장 선한 살아 있는 존재자이며 지속적이며 영원한 생명과 그 유지가 신에게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신이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신약성경이 기독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에 대한 성경의 견해와 비교될 수 있음. 우주를 존재하게 한 신적 로고스(말씀)는 창조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한 바로 그 신적 말씀이기 때문. 성부 하나님이 그를 만물의 주로 삼으심.
-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최고 형태의 활동으로 추켜세우고 있는 대목에서 신의 활동이 관조로 이루어진다는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음. 인간 본성은 이 관조 활동을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없음. 다른 것들이 필요함. 그러나 신들의 경우는 다름. 그들은 스스로 알아서 관조를 할 수 있음. 그래서 관조하는 사람을 신들이 가장 좋아함.
- 유대기독교신관과 다름. 유일신과 다신론. 부동의 원동자를 말하면서도 다신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 성경의 지혜문학이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과 지혜는 관조적인 삶 이상의 것. 말씀에 대한 묵상과 야훼의 길 가운데서 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짐. 그리고 창조의 기원이 되면서 목표가 되는 독특한 인격자이신 창조주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없음. 그렇지만,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은 기독교 사상과 양립할 수 있음.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점을 잘 보여줌. 세계에 대한 우리 인간의 경험이 제기하는 물음들에 대해 성찰하는 방법, 부동의 원동자를 다른 존재자들과는 다른 질서에 속해 있는 존재로 보는 개념, 또한 모든 생명과 에너지의 자충족적이며 살아 있는 원천으로 보는 개념 등등이 유사.
- 신학적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감관을 통해서 파악하는 물질 세계는 그 물질세계와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실재에 의존해 있다고 주장하는 플라톤주의를 벗어나지 않음. 그러나 그 실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플라톤의 설명과 판이하게 다름. 나중에 기독교 안에서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철학적 설명구조를 제공하기 위해서 플라톤식을 따르는 사람들과 아리스토텔레스식을 따르는 사람들이 구분되어 생겨남.
- 인간의 본성과 윤리학
- 인간 본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플라톤의 견해와 공통적인 점도 있고 아주 다른 점도 있음. 플라톤처럼 그는 소피스트들을 인정하지 않음. 그러나 선의 이데아라는 것을 공허한 메타포로 봄. 또한 영혼의 환생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음.
- 아리스토텔레스가 볼 때, 영혼(프슈케)은 “어떤 점에서 모든 동물 생명의 원리”임. 심지어 모든 생명체에 어떤 종류의 영혼(프슈케)이 있다고 봄. 인간 영혼과 다른 종류의 영혼을 구별시켜주는 것은 인간 영혼의 이성적 능력임.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며 동시에 정치적 동물. 선악, 정의/불의 등등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 살아 있는 존재자들이 서로 어울려 지낸다는 점이 사람의 특징.
- 윤리, 에티카(ethika) – 현대에는 행동을 규율하는 표준/기준들과 관련되어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는 다름. 에티카는 습관과 품성과 더 관계되어 있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관심은 아레테(arete)와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아레떼는 “덕성”, 유다이모니아는 “행복”.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아레떼는 “탁월성”이라는 뜻이 더 많음. 열정과 행동의 특징을 이루는 어떤 것을 말함. 탁월한 논증, 우수한 칼 등등을 얘기할 수 있듯, 인간을 우수 혹은 탁월하게 만드는 것을 아레떼라고 말할 수 있음. 유다이모니아도 물질적 필요나 욕구의 만족이라는 의미의 행복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바에 대한 실현이라는 의미에서의 행복. 그 최고 활동은 관조에 있음. 탁월성을 소유한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올바른 법의 지배를 받는 사회 가운데서의 습관을 개발하는 훈련이 필요함. 인간은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그 수단에 따라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음. 지혜와 유덕한 생활은 양극단을 피하는데 있음 (중용). 용감성은 비겁과 만용 중간에 옴. 중용(절제)는 방탕과 금욕 양극단을 피하는 것.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 결정을 내리는 절차를 제공하려고 하지 않고, 도덕 개념들의 형태에 대해 메타-윤리적 진술들을 하고 있는 것임. 덕성은 양극단을 피하는 것.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소위 중용론(the doctrine of Golden Mean)의 기초를 이룸.
- 주체적인 개인에만 초점을 맞추어 세계 안에서의 전반적인 구조와 목적을 보지 못하는 현대적 사고와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객관적 진리와 목적의 발견에 관심을 기울임. 그의 출발점은 “모든 기술, 모든 탐구,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선(좋음)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된다. 이 때문에 선은 만물이 목적하는 것이라고 선언되는 것이 당연하다.” 덕은 품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 그리고 “도덕적 탁월성은 습관의 결과로 온다.” 습관이라는 말은 내적인 품성이나 내적 능력을 의미. 이러한 점을 관찰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행위와 품성(성격)의 조성 사이의 관계를 복잡하게 분석하게 되었음. 행위와 품성(성격)은 사회의 마당을 살아가는 삶과 분리될 수 없음.
-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2부에 나오는 그의 윤리사상 발전의 개념적 도구를 제공해 주었으며, 현대에 이르러,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알라스대어 매킨타이어와 같은 기독교 윤리학자들의 노력에 동력을 제공해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