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회의주의자들 및 견유학파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황금기를 지나 헬레니즘의 시대에 돌입하게 됨. 헬레니즘이란 헬라어 ‘헬렌’(Hellen)이라는 단어와 관계 있음. 원래 ‘헬레니스모스’라는 말은 ‘공용 헬라어’의 지배를 가리킴. 나중에 헬레니즘은 지중해 세계를 그리스 권력과 문화가 지배하게 된 시기를 가리키게 됨.
- 일반적으로 헬레니즘은 그리스 권력과 문화가 동방 지역에 침투해 들어갔다가 역으로 동방의 영향을 받은 복잡한 현상임. 이 현상의 일부가 그리스 문화와 유대 문화 및 종교의 상호작용. 이것이 기독교 등장기의 분위기를 제공. 철학 분야에서는 이 시기 새로운 학파들이 생겨남. 아테네는 여전히 헬라 철학의 중심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은 소요학파에 의해 이어짐. 그러나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주의, 회의주의자들이 무대에 등장함.
- 에피쿠로스 학파
- 에피쿠로스 학파는 에피쿠로스의 철학과 관련. 그는 주전 대략 341-270년 사람. 그러나 그의 가르침이 단편적으로 또는 편지로 남아 있음. 에피쿠로스 시대에서부터 근대기에 이르기까지 에피쿠로스 사상은 찬탄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왔음. 대략 주전 170년 에피쿠로스 추종자들이 로마에 그들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당시 권위와 전통에 권력을 세웠던 귀족 지배층이 그들을 위험한 사회 전복자들로 여겨 추방했음. 그러나 백년 뒤 그리스 문화가 로마 사회에 더 깊숙이 들어옴으로써 더 많은 개종자들을 얻음. 그들 가운데 시인인 루크레시우스(Lucretius, 주전 99-55년 혹은 94-51년)이 있음. 그의 위대한 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에피쿠로스 이론에 대한 주요 해설을 제시. 고전적 에피쿠로스주의는 기독교 세기인 주후 3세기에까지 살아남았음. 그러다가 근대기에 부활.
- 르네상스 시대에 루크레시우스가 시인으로서 재발견됨. 17세기에 합리주의 과학자이자 신부였던 삐에르 게센디(Pierre Gassendi)가 고전적 에피쿠로스 텍스트들을 연구하여 도출한 에피쿠로스적 모델에 근거해서 우주에 대한 원자설을 개진함. 18세기에는 데이빗 흄과 토마스 제퍼슨을 포함해서 유물론적으로 기운 사상가들이 에피쿠로스주의를 표방함. 많은 점에서 근대의 경험주의는 고전적 에피쿠로스주의의 직접적인 후예라고 볼 수 있음.
-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가 탄생한 시대는 불확실성과 동요의 시대. 도시국가의 민주정의 이상은 정치권력투쟁과 경제위기의 시대에 호소력을 상실. 이전 세기의 사상적 거두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환멸을 느낀 자들과 회의적인 자들에게 아무런 메시지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짐. 사원들과 신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기 시작함. 이런 시대에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이 생각있는 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뒤흔들었던 의문들에 대한 답변으로서 대안적인 세계관을 제시함.
- 어떤 의미에서 에피쿠로스는 근대경험주의자들의 선구자임. 그는 인간의 모든 지식이 우리가 사용하는 감각들의 감각 작용들에서 나온다고 가르침. 반복적인 감각작용에 의해서 우리가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일반적인 개념들이 생겨난다는 것. 에피쿠로스 자신의 예를 들자면 우리는 우리가 말이나 소, 사람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단어들에게 대해 연결해서 가지고 있었던 이전의 지각들에 현재의 지각이 들어맞기 때문에 말이나 소, 사람을 인식한다는 것. 하나의 판단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보다 면밀한 검사를 통해 나온 증거의 확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
- 더 나아가 에피쿠로스는 세계가 허공을 운행하는 나뉠 수 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함. 이 원자들은 수에 있어서 무한하며, 계속해서 운동한다고 말함. 때때로 이 원자들이 임의적으로 벗어나는데, 이것이 인간 행위에 어떤 비결정성과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 원자들은 충돌하면서 물체들을 형성. 우리의 세계는 무한한 수의 세계들 중 하나. 그런 세계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 세계와 유사하지만, 어떤 세계들은 그렇지 않음. 특정한 물체들과 우리 세계 자체는 변하고 쇠함. 그러나 원자들은 파괴되지 않으며 변하지 않음. 원자들은 다른 배열들 가운데서 계속해서 존재.
- 자연의 주제를 숙고하면서 적자생존론을 받아들임. 운명이나 신의 섭리와 같은 사상은 배격함. 신들이 존재한다고는 보았지만, 신들에 대한 대중들의 생각에 오류가 있다고 봄. 일례로 신들은 사람들이 믿듯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또 다른 례로 신들은 세상사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사후세계같은 것은 없고, 죽음이 인생의 끝이며, 그와 더불어 선악에 대한 우리 경험도 끝이라는 것. 몸의 죽음과 더불어 우리의 감각들도 죽는다는 것. 그래서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도 사라진다는 것. 그러므로 죽음은 악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 에피쿠로스가 세상을 본질적으로 물질적으로 보았지만, 쾌락을 우리의 최고선으로 간주하고, 고통을 악을 간주. 진정한 쾌락은 육체에 고통이 없는 것이며 영혼에 괴로움이 없는 것. 섹스에 탐닉하는 것이나 좋은 최고급 음식에 탐닉하는 것도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을 유발시킬 수 있음. 최대의 선은 그러므로 신중한 분별력(prudence). 거기에서 다른 모든 덕이 나온다고 봄. 신중한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생각의 쾌락(즐거움)을 즐기면서 운명, 우연, 죽음의 공포 등등에 대한 어두운 생각을 내칠 수 있다는 것.
- 에피쿠로스 학파는 공동체(꼬뮨)면서 아카데미이기도 했음. 에피쿠로스 자신은 일종의 자연의 복음을 설교했던 세속적인 전도사였음. 그는 그 공동체를 주관했고, 그 무리에 남녀가 다 포함되어 있었음. 그 종파는 어떤 금욕생활을 실천. 그렇지만, 난잡한 파티와 성적 방종에 대한 비난을 피하지 못함. 에피쿠로스 공동체들은 구성원들에게 일반사회로부터의 도피와 대안적 생활스타일을 제공. 에피쿠로스는 교육에 대한 전통적 사상 몇 가지를 거부. 결혼의 책임이나 자녀를 갖는 일의 책임 등을 반대. 독립적이 되어 대중으로부터 떨어져서 조용한 생활의 안정을 누리는 것이 더 낫다고 봄.
- 스토아 주의
- 에피쿠로스 학파의 주요 라이벌이 스토아주의였음. 스토아주의는 5백년 동안 지배적인 철학 세력이었음. 에피쿠로스주의가 소수의 엘리트와 교양인들 가운데서 추종자를 얻었다면, 스토아주의는 훨씬 더 폭넓은 지지를 확보함. 그리스에서 시작했지만, 마침내 로마인 가운데 최고 지성인들 몇 사람이 받아들이게 됨. 주전 3세기부터 주후 2세기까지. 스토아주의라는 말은 대략 주전 3세기 아테네에서 시키움의 제노(Zeno of Citium)가 가르치기 시작했던 ‘포이킬레 스토아’(poikile stoa, 채색된 포치)에서 나왔음. 그 장소는 실제로 그림들이나 프레스코가 있는 주랑이었으며, 고대 아테네의 국립 미술관 같은 곳이었음. 제노는 상당한 추종자들을 모았음. 그 과정에서 온갖 영예가 그에게 주어졋음. 금관도 있었고, 동상도 있었음. 마침내 스토아주의자라는 말이 제논주의자라는 말을 대체하게 됨.
- 스토아주의는 세 주요 단계로 구분될 수 있음. 초기는 제노와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들인 크레안테스와 크리시포스 시대. 그들의 사상은 단편만 남음. 중기는 주전 2세기와 1세기. 대표자는 로데스의 페네시우스(Paenetius of Rhodes)와 그의 제자였던 아파메아의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of Apamea). 페네시우스 밑에서 로마의 지성인들 중에 추종자를 얻기 시작함. 그 중에 스키피오(Scipio)가 있음. 포시도니우스는 역사에서의 황금시대론을 발전시키고, 우주론을 이론화함. 후기 스토아주의는 기독교 시대의 로마세계에 속함. 세 명의 대표자는 세네카, 에픽테터스,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황제.
- 세네카(Seneca, 대략 주전 4년-주후 65)는 웅변가이자 비극작가. 세네카와 더불어, ‘디아트리베’(diatribe)가 사상과 가르침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새로운 인기를 얻음. 이 말은 담론 혹은 짧은 윤리적 소론을 의미하는 헬라어 ‘디아트리베’(diatribe)에서 나옴. 제노와 클레안테스에게서 발전해 나왔으며, 스토아주의자와 냉소주의 가르침의 특징적인 도구가 됨. 세네카는 황제 네로의 개인교수이자 정치 고문 및 대신으로 일함. 네로의 학정을 점점 참지 못하게 되어 공직 생활에서 은퇴함. 마침내 막대한 자기 재산을 황제에게 몰수당하게 됨. 말년에 철학 연구와 친구들과의 사귐에 바침. 주후 65년 황제에 대한 음모설 때문에 자살하지 않을 수 없게 됨. 제롬과 어거스틴 둘다 세네카와 사도 바울 사이에 오간 편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남아 있는 편지들이 가경에 포함되어 있지만, 위조품임. 또한 사도 바울이 스토아주의의 디아트리베 작문기술을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 제기되는 물음 중 하나임.
- 에픽테터스(대략 50-138년)는 네로의 근위대원이었다가 자유를 얻은 노예출신. 주후 90년까지 로마에 있었음. 그때 도미시안 황제가 로마 시에서 철학자들을 추방함. 그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였던 아리아누스(Arrianus)가 기록한 <담론 Discourses>에 보존되어 있음. 주로 윤리적인 문제에 파고듦. 그는 내적인 도덕적 성향이 있어서 그것이 쇠퇴할 수도 교육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음.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은 명상록의 저자. 논리학과 우주론에 대한 깊은 불신. 이전의 스토아주의자들처럼, 몸과 영혼, 혹은 생명과 생각(누스)를 구분. 에픽테터스와 마찬가지로, 생각은 만인 안에 있는 신성의 불꽃이라고 봄. 따라서 신이 만인 가운데 있음. 그러나 누스는 우주가 끝나는 때에 사멸할 것이라고 봄. 도덕적 교훈에서는 내적인 자기 통제와 유용한 시민정신을 강조. 섭리나 혼란에 무관하게 스토아적인 평정을 이성적으로 인생을 맞이해야 한다고 말함. 운명적인 필연성이나 질서가 있다면,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
- 오늘날 스토아주의자라는 말은 너무 큰 기대를 갖지 않고 두려움에 떨지 않는 사람들을 말함. 삶을 스토아적으로 맞이하는 것은 기쁨이나 곤경에서 가능한한 무관하게 담담히 지내는 것을 말함.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추천한 전망을 받아들이는 것. 그러나 역사적 스토아주의는 그 이상임. 윤리분야뿐 아니라 논리학과 물리학 분야의 사상도 수용했었음. 종교적인 면에서 스토아주의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소위 신적인 것의 ‘일상화’ 혹은 구체화나 그 반대로 물질의 신성화 혹은 영화/신령화(spiritualization)임.
- 제노와 그 추종자들의 가르침. 우주에 두 개의 원리. 능동적 원리와 수동적 원리. 수동적 원리는 질이 없는 실체 즉 물질이며 능동적 원리는 이 실체 안에 고유한 이성 혹은 로고스 즉 신이라는 것. 신은 영원하며 물질 전체에 흩어져 있는 각각의 여러 사물을 만든 자. 제노는 신이 이성이며 운명이며 제우스이며, 여러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고 말함. 마찬가지로 코스모스도 신을 의미할 수 있고, 천체의 질서정연한 배열 또는 신과 우주의 총합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말함. 스토아주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여러 다양한 논증을 함.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모든 곳의 사람은 다 신의 존재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다는 믿음. 키케로가 말했듯, 핵심은 만인의 마음에 신들이 존재한다는 본유적인 믿음을 새겨놓고 있다는 것.
- 고전적 스토아주의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서 끊겼지만, 그 사상들은 16세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느껴짐. 신약성경은 사도 바울이 스토아 가르침을 끄집어내어 대답을 하고 있음을 보여줌. 또한 칼빈과 스피노자에게서 스토아주의 가르침의 흔적이 나타남. 칼빈은 키케로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말했으며, 스피노자는 신이나 자연이 단일 실재라는 스토아주의 견해를 진술함.
- 회의주의
- 최초의 회의주의자들은 회의주의자들이라고 불리지 않고 그들의 스승 엘리스의 피로(Pyrrho of Elis, 주전 대략 360-270)의 이름을 따라 피론주의자들이라 일컬어짐. 헬라어 스켚티코스는 원래 묻는자, 탐문자라는 뜻. 그러나 피로시대 이후로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의심을 던지고 사실들이 과연 알 수 있는 것이냐 묻는다는 어조를 획득하게 됨. 피로 자신은 아무 저술을 남기지 않았음. 그에 대해서는 디오게네스 래르시우스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글을 통해서 나온 것임. 이들은 주후 2-3세기 사람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확실히 회의주의자였으며, 래르시우스도 그럴 가능성이 있음.
- 초기 회의주의자들은 소위 에포케(epoche)를 믿음. 에포케란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유보한다는 뜻. 피로에 대한 스토리들에 따르면, 그는 실재의 본성에 대한 모든 이론을 피하고 장래에 대해 생각하기도 거부. 이론은 좌절로 인도하고 뭔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은 걱정만 만듦. 피로의 목표는 아타락시아(ataraxia)를 얻는 것. 흔들리지 않는 평정의 상태.
- 회의주의의 가르침을 기록하는 일은 피로의 계승자들에게 떨어짐. 그 당시, 아테네의 아카데미도 회의주의의 길로 들어섬. 플라톤의 죽음 이후 반플라톤주의 물결이 일어남. 주전 3세기 아르세실라우스(Arcesilaus)가 중도 아카데미(Middle Academy)라고 알려지게 된 입장을 출발. 그 회의적인 태도가 2세기를 지배. 아르세킬라우스는 소크라테스에게로의 복귀를 주장. 지식을 나누어주고 철학학파들의 도그마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소크라테스처럼 잘못된 생각에 대한 반박에 심혈을 기울이라고 얘기. 중도 아카데미학파는 더 회의적인 신 아카데미학파에 길을 내줌. 주공격 대상은 스토아주의였음. 특히 아카데미학파 사람들은 물질을 인식의 기준으로 보는 것, 우주의 본성에 대한 도그마적인 생각들, 신들의 본성에 대한 믿음, 운명론 등등을 비판.
- 대략 주전 80년 경에, 아카데미는 도그마주의로 회귀하지만, 곧 그후에 알렉산드리아 피론주의를 부활시킨 회의주의 학파가 창설됨. 시간이 지나면서 이 학파는 경험주의적 의학파와 연결됨. 경험주의적인 의학 학파는 증상을 관찰하고 증후군을 기술하고 그 둘 사이의 연결에 주목. 이것은 이론적 혹은 논리적 의학파와 대조를 이룸. 이 대표자가 바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였음.
-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인 정사(精査)와 서로 부닥치는 견해들을 살펴보는 것은 유용한 일. 그러나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 도피하는 것은 문제와 해결을 혼동하는 것. 지식 추구는 부닥치는 견해들에 대한 세심한 검토와 평가가 요구됨.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주장한 온건한 유형의 회의주의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보다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회의적인 테크닉을 적용하면서 축소됨. 사상가들에게 끊임없이 어필했지만, 완벽한 확신을 지니도록 하는데 성공하지 못함. 어디에서 회의를 멈추어야 하는가?
- 어거스틴 - <아카데미학파에 대한 반론>에서 회의주의가 어느 정도 중요성을 지님. 회의주의 및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대한 관심이 16세기에 다시 일어나, 유럽철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함.
- 견유학파(냉소주의)
- 스토아주의자와 회의주의자들의 동시대인 가운데 견유학파가 있었음. 사실은 조직된 학파를 이루지는 못했음. 그렇지만 고대 철학 세계의 일부를 형성. 신약성경의 배경에 자리잡고 있음. 그들의 역사는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대략 주전 400-325)라는 인물에게까지 소급됨. 그의 기행 때문에 퀴온(kyon) 즉 ‘개’라는 별명이 붙었음. 시닉(Cynic)이라는 말은 형용사 퀴니코스(kynikos) 개같은 이라는 말에서 나왔음. 한번은 플라톤이 “탁자-성”(tablehood), “컵-성”(cuphood)과 같은 말을 사용해서 이데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은 디오게네스가 나는 탁자와 컵은 볼 수 있겠는데, 탁자됨, 컵됨은 안 보이는구려 라고 말했다고 함. 이에 즉시 플라톤이 대답했다고 함. “그건 금방 설명할 수 있지. 그대는 보이는 탁자와 컵은 볼 눈이 있지만, 탁자됨과 컵됨의 이데아를 식별한 눈은 없기 때문이요.” 플라톤에게 있어서, 디오게네스는 미친 소크라테스였던 것.
- 디오게네스가 했다는 수많은 경구가 있음. 돈에 대한 사랑은 모든 악의 출처다. 선인은 신들의 형상이다. 그러니 빈둥거리며 노는 일을 사랑하라.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녔다는 얘기. 탐욕과 가식과 어리석음이 그의 위트의 타깃이었음. 그의 기본 메시지는 가장 단순하고 값싸고 기본적인 방식으로 자연적인 인간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 그 결과 수치심 없이 자족하는 생활철학이 나옴. 인간의 관례를 자연적이지 않다고 봄.
- 견유파들은 주전 3세기에 성행. 스토아 사상 형성에 기여. 에픽테터스의 글을 보면, 디오게네스는 더 이상 쇼맨이 아님. 고고한 금욕적 가르침을 하는 고귀한 선생. 견유파는 사라졌지만, 그 운동이 주후 1세기에 부응. 극단주의 운동이 됨. 유랑하면서 단순한 삶을 전파하는 사람들. 로마와 동방에서 유명하게 된 견유학파의 걸인(탁발) 철학자들도 있었음. 그들의 글이 6세기에까지 살아 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