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에 대한 두 가지 기독교적 입장
- 자기들 주위의 사상들의 싸움을 보고 기독교 지성인들이 두 진영으로 나뉨. 철학을 인정하고 활용한 사람들과 철학을 마귀에게 속하는 것으로 보고 철저히 반대했던 사람들. 자기의 영적인 순례의 길에 철학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이 어느 진영에 속하느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됨.
- 저스틴 마터(대략 165년 사망)는 하나님을 찾고자 철학의 문을 두드림. 스토아 철학자, 소요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플라톤주의자… 나중에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저스틴에게 성경을 소개해주고, 기도가 바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고 가르쳐줌. 저스틴은 기독교 신앙이 유일하게 가장 믿을만하고 유익한 철학이라고 여기게 됨. 그 후 기독교가 모든 참된 철학들의 절정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함. 계속해서 철학자의 옷인 팔리움(pallium)을 입고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이교 세계를 준비시켜주었다고 주장. 신적인 말씀(로고스)가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이교신앙의 오류를 볼 수 있게 눈을 밝혀주었다고 봄. 그와 같이 이교의 세상 가운데서 신적 로고스에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주장.
- 저스틴의 로고스의 사상.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하는 개념적 도구를 그에게 제공해 줌.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일 수 있는가? 우리가 말(logos)을 발설할 때, 그 말은 우리 생각을 표현하게 되는데,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의 힘에 있어서 전혀 줄어들지 않고 우리의 말로 남아 있다는 것. 이러한 사상을 만물을 창조한 신성한 로고스에 대한 이해의 모델로 활용함.
- 저스틴과 변증가들의 로고스 론은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고, 삼위일체론과 성육신에 대해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함. 저스틴과 더불어 교리가 성경적 가르침에 굳게 뿌리를 내림.
- 그러나 정반대의 결과도 나옴. 아리안주의자들의 경우. 그들은 오리겐을 따라서 말씀 혹은 이성이 어떤 식으론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피조물 혹은 피조된 존재라고 믿었음. 그들이 볼 때, 성육한 말씀은 어떤 종류의 피조물이었으며 그리스도는 성육하신 하나님으로 예배될 수 없었음.
-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인 클레멘트(대략 150-대략 215)와 오리겐(대략 185-대략 254년)의 철학에 대한 존경은 한 걸음 더 나간 것임. 클레멘트의 <스트로마테이스> (Stromateis)는 기독교의 영지가 다른 형태의 영지들보다 더 우월함을 입증하고자 함. 논의하는 중에 클레멘트는 그리스 철학이 구약 선지자들이 해명한 철학에서 광범위하게 차용했음을 보여주려고 시도. 클레멘트와 오리겐 둘 다 필로의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을 끌어다 씀. 그들의 의도는 기독교신앙을 당대의 철학 형태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진짜 의미를 보여주려는 것. 오리겐은 사람이 몸과 영과 혼이 있듯, 성경도 그렇다고 주장. 몸에 해당하는 것이 문자적 의미. 혼에 해당하는 것이 도덕적 의미. 최고의 의미는 영적인 의미. 따라서 문자적 의미에서 여리고의 두 소경의 치유는 그들의 치유에 대한 기록이며, 도덕적 수준에서는 우리의 눈이 하나님 말씀으로 열려야 함을 의미. 우리가 우리의 여리고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영적 수준에서는 두 거지는 북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이며, 여리고는 그들의 세계라는 것.
- 하나님, 성육신, 구원에 대한 오리겐의 견해는 완전히 중기(혹은 중간) 플라톤주의와 기독교회의 가르침의 조합이었음.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는 재앙이었음이 드러남. 엄격한 의미에서 성부만이 신성하다는 주장은 4세기 아리안 논쟁의 토대를 마련함. 성육신에 대한 그의 진술은 플라톤의 영혼선재설을 타락과 성육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결합시킨 것임. 플라톤처럼 오리겐은 영혼의 선재성을 믿었음. 단 하나의 영혼을 제외하고 모든 영혼이 타락하여 죄악된 사람의 형태로 사람의 몸과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하나의 영혼은 타락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혼. 완전한 사랑 가운데서 신성한 로고스와 연합했다는 것. 그 영혼이 성육하게 되었을 때 그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
- 플라톤처럼, 오리겐은 현재의 인생 이후의 이어지는 정화를 믿음. 그 믿음 때문에 사탄을 포함한 만유의 보편적인 구원론을 갖게 됨. 오리겐의 가르침은 그의 시대의 철학적 도구를 사용해서 기독교 신앙을 제시하려는 시도였음. 그러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대신, 일련의 논란을 불러일으킴. 그리하여 6세기에 이단으로 정죄됨.
- 그리스의 교부들과 대조적으로 라틴 교부인 터툴리안(대략 155-대략 220년)은 철학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자. 인류의 가르침들은 다 귀신들의 가르침들이라는 것. 철학을 폄훼하는 표어가 된 유명한 말.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냐?
- 그러나 터툴리안의 수사법을 잘 살펴보면, 세 가지 사실이 드러남. 첫째, 터툴리안은 철학을 경쟁적인 세상 견해들의 합작품이라 보았다는 점. 그래서 성경 계시와는 매우 다른 전제들에 기초해 있다는 것. 둘째, 터툴리안은 이단이 철학 때문에 부추겨진다고 봄. 특히 발렌시우스의 영지주의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탓이라고 여김. 바울이 골로새서 2:8에서 철학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접촉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봄. 세 번째 요소는 터툴리안의 저작 전반에서 나오는 것. 그가 철학 사상들을 암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 특히 기독교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하면서 스토아 사상들을 사용. 한 번은 철학자들이 때대로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말을 한다는 점을 인정. 그러나 이교 사상가들이 구약 성경에서 그런 사상들을 훔쳐갔다고 말함. 세네카를 진리의 편으로 자주 인용. 오늘날 터툴리안에 대해 정통한 권위자는 터툴리안을 기독교 소피스트로 봄. 즉 냉소적인 혹평과 수사학에 능숙한 대가라는 것.
- 삼위일체에 대한 터툴리안의 설명 – 성경의 가르침을 세속 사상과 결합시킴. 플라톤의 선의 형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동자처럼, 터툴리안의 하나님은 모든 변화 위에 계심. 터툴리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무감동성 – 하나님이 고난을 받으실 수 없다는 견해 – 이 가장 중요.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고난을 당하셨음을 인정. 그러나 성부 하나님은 모든 변화와 고난 위에 계신다. 예수님 안에서 신성의 요소는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 고난을 당한 것은 오직 인성이었다.
- 터툴리안에게 서방 교회는 그 기본적인 신학 어휘를 빚짐. 저스틴과 변증가들의 로고스 론을 재진술했으나 신학에 새로운 정확성을 부여함. 스토아 사상에서 지극히 순화된 종의 물질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수브스탄시아’(substantia, 실체)라는 단어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 성자를 성부의 실체와 하나인 실체에 속한다고 말함. 또한 성자가 두 개의 ‘수브스탄시아’ 즉 신적 수브스탄시아와 인적 수브스탄시아로 이루어졌다고 말함.
- 이러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터툴리안은 문제점을 해결하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 함. 그 용어들 자체는 성경에 있는 말이 아님. 세속 세상에서 끌어온 말들임. 철학적 맥락에서는 사뭇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말들. 터툴리안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표현하기 위해 그 용어들을 사용했음. 성경의 다양한 부분에서 발견될 수 있는 진술들이 지니고 있는 암축적인 의의를 그 시대의 언어 안으로 번역함. 이러한 번역 행위는 다른 곳에서 온 용어를 수단으로 해서 여러 다른 텍스트들의 사상들을 종합하고 표현했다는 것을 의미.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정당할 수 있느냐? 바로 텍스트들 자체가 해석을 요청하고 있으며, 그 해석을 보장하는 자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 이러한 수단을 통해서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였음.
- 터툴리안 사후 2백년 동안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언어적 정식화를 놓고 여러 차례 논란을 벌임.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규정하기 위해서 보편 종교회의들이 열리게 됨. 결국 교회는 터툴리안이 택한 길과 동일한 길을 따라감. 니케아 회의는 그리스도가 그의 신성과 관련해서 성부와 “동일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믿음을 확정함. 이 결정을 다시 칼세돈 회의에서 비준. 또한 성자는 우리의 인성과 관련해서도 우리와 동일본질임을 첨가.
- 어거스틴(354-430)
- 어거스틴은 위대한 사상가의 한 사람. 가장 개인적인 사상가들 중 하나이기도 함. 그는 자신의 삶을 자기 사상으로부터 가능한 한 떨어뜨려 놓으려는 철학적 틀에 맞지 않음. 어거스틴의 경우, 삶과 사상, 철학과 신학이 서로 나눌 수 없이 엮이어 있음.
- 어거스틴은 지금은 알제리아가 된 북 아프리카에서 태어남. 그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 아버지는 이교도였음. 청소년 때에 기독교를 배격함. 키케로를 읽고 지혜 추구에 나서게 됨.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그의 영적인 순례는 아주 오래 걸렸음. 그의 문제는 지적인 문제였으며 동시에 개인적인 문제였음. 지적 수준에서, 그는 어떻게 악의 존재성이 교회와 성경이 선포하는 선하신 하나님과 조화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음. 한동안 어거스틴은 두 개의 궁극적 원리가 있다는 마니교도들의 이원론적 가르침을 수용. 하나는 선과 영혼에 대해 책임이 있고, 다른 하나는 물질과 육체를 포함하는 악의 원천이라는 것. 개인적인 수준에서 어거스틴은 성적 욕망과 여타의 욕망의 지배를 받음. 극복하기 불가능함을 발견. 그 당시 마니교는 편리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음. 그리하여 자기의 죄에 대해 자기가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다른 무엇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음.
- 한 동안 카르타고에서 가르쳤고, 그 다음에 로마와 밀란으로 이사와서, 그곳에서 수사학 교수가 됨(384). 이 시기에 마니교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함. 아카데미의 회의론에 인상을 받음. 그러나 또한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가 라틴어로 번역한 플라톤주의자들의 어떤 책들에 접하게 됨. 그 책들은 아마도 플로티누스의 <에네아드>였던 것으로 보임. 빅토리누스는 서구 사상사에 중요한 역할을 함. 그는 신플라톤주의 저수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몇 가지 저술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논문을 여러 편 쓰기도 했음. 그렇게 해서 그는 그리스 사상을 라틴 세계로 중개해 주었음. 나중에 빅토리누스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 그의 신학 저술들은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사상에 채용하는 길을 열어줌.
- 빅토리누스는 그의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앙으로 어거스틴에게 깊은 인상을 줌.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에게 두 가지 점을 확신시켜줌. 첫째, 실재로 영적 실재가 있을 수 있고 있었다. 둘째, 악의 실재는 창조 교리와 조화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악이 적극적이지도, 피조되지도, 현실태적이지도 않은 것(not a positive, created, actual thing)이라고 보게 되었음. 악은 결핍 혹은 결여였음. 이 말은 악이 마음에만 있는 것이라거나 환영일 뿐이라는 말이 아님. 그것은 어떤 실재를 가지고 있었음. 그러나 피조된 것이 아니었음. 예를 들어, 눈멀음은 환영이 아님. 그것은 끔찍한 고난임.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님. 눈멀음은 시력의 결여임. 도덕적 악은 확실히 실재함. 그러나 피조된 실체는 아님. 사람들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임. 도덕적 악은 인간의 의지 안에 옳음이 부재함을 내포함. 악에 대한 이런 식의 견해를 개진함에 있어, 어거스틴은 악에 대한 종합적 진술을 제시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음. 그가 하고 있었던 것은 마니교도들의 설명보다 더 실재적이며 납득이 가는 설명을 제공하려는 것이었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설명이었음. 그것은 세상 안에 있는 도덕적 악과 물리적 악의 존재가 어떻게 선하신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양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설명이었음.
-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의 순례의 길의 종착지가 아니었음. 그것은 신앙에 이르는 일종의 디딤돌이었음.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의 개인적인 도덕적 문제점들을 해결해 주지 못했음. 밀란의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와 스스로 신약 성경을 공부하고 빅토리누스의 회갬 및 이집트의 안토니의 생애에 대해 독서함으로써 기독교로 개종하게 됨. 한 동안 계속해서 번민하고, 기독교의 지성적 진리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스타일에 끌렸지만, 그 자신의 의문스러운 생활 방식을 포기하기를 꺼렸음. 그의 고백록을 보면, 어거스틴은 자기가 내면의 번민이 극에 달했을 대, 한 아이가 “집어들어 읽어라, 집어들어 읽어라” 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소리를 줏어 듣게 되었는지를 기술해 놓았음. 그리하여 그가 우연히 로마서 13:13-14에 있는 바울의 글을 펼쳐 읽게 되었다는 것. 그는 더 읽을 필요가 없음을 느낌. 즉시 이 문장의 끝에 이르러 빛이 자기 마음 속에 평안을 줌. 의심의 어둠이 사라져버림.
- 어거스틴은 387년 부활절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음. 다음 해에 아프리카로 복귀. 391년에 사제로 서품 받음. 4년 후에 감독이 됨. 396년에 히포 교구를 물려 받음. 반달 족이 히포를 포위했을 때 죽음. 히포의 감독으로 있었던 여러 해에 많은 결실을 맺음. 그의 저작들은 후대 서구 신학만이 아니라 후대 철학의 상당 부분의 토대를 놓음. 397년과 401년 사이에 씌어진 그의 <고백록>은 새로운 문학 양식을 만들어냄. 단순히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적은 것이 아니라 심리적 영적 자기 분석을 포함시킨 획시기적인 저작임.
- <자유의지론>을 포함해서 마니교에 대항한 여러 저술들은 창조론, 악의 문제, 인간의 의지에 대한 교리를 제시. 아주 많은 사람들을 영지주의와 마니교의 이원론으로 이끌었던 사상보다 탁월한 대안이 됨. 도나티스트 분열에 대한 어거스틴의 대답은 서구 교회의 교회론의 전범을 제공해줌. 펠라기안주의의주제에 대한 글은 은혜와 자유의지의 문제의 첨예한 쟁점들을 명료화시켜줌. 그의 주저 <삼위일체론>을 포함하는 많은 신학적 저술들은 헬라 교부들의 저술들보다 더 나은 모델을 제시. 그의 <신국론>은 신성한 사회와 지상의 사회 사이의 기본적인 갈등/싸움의 맥락에서 역사에 대한 파노라마적 관점과 역사에 대한 신학을 제공해 줌.
- 로마 가톨릭주의와 프로테스탄트주의는 둘 다 어거스틴에 뿌리를 두고 있음. 교회에 대한 가톨릭의 강조, 값없는 은혜에 대한 개신교의 강조가 다 어거스틴에게 있음. 그러나 주의. 가톨릭에도 은혜론이 있고, 개신교에도 교회론이 있음. 그러나 어거스틴이 후대에 미친 엄청난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음. 그의 영향은 신학 쟁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 어거스틴은 시간론도 개진. 러셀의 평가. 이전의 시간론보다 더 우수하고 칸트의 주관적 이론보다 훨 낫다.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한 어거스틴의 진술은 비트겐시타인에게 그의 철학논고의 출발점을 제공해줌. 회의주의에 대답하면서 어거스틴은 데카르트의 고기토 에르고 숨을 예견하는 논증을 개진함.
- 믿음, 이성, 하나님의 존재와 관하여 어거스틴은 안셀름의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공식과 연결되어 있는 입장을 발전시킴. 분명히 안셀름이 어거스틴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음. 어거스틴은 신앙과 이성이 함께 속한다고 믿음. 지식을 얻는데 제 역할을 한다고 봄. 그의 설교 한 편의 끝에 이렇게 썼었음. “내 말을 믿으려면 이해하시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려면 믿으시오.”
- 어거스틴은 한 편지에서 이성이 하나님이 주신 기능임을 관찰했다고 더 충분하게 설명. 어거스틴에게 신지식은 기본적이며 직관적 인식임. 그러나 이 지식은 경험과 양립할 수 있음. 그리고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이성적 성찰에 의해 확증됨. 그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창조세계가 증거하는 하나님임. 피조물의 유한성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 유한한 인간 실존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음.
- 철학은 지복의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이라고 봄.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철학은 헛됨. 철학에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실재가 필요함. 철학 개념들은 복음의 빛에 의해 수정되어야 함.
- 그러나 모든 철학자들처럼 어거스틴도 그의 시대의 아들이었음. 그 시대의 개념적 틀을 사용했음. 특히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 그러나 어거스틴은 결코 단순히 한 사람의 플라톤주의자가 아니었음. 아퀴나스의 어거스틴 평가. “자신이 받아들이는 믿음과 일치하는 것을 그들의 진술들 가운데서 발견할 때마다 플라톤주의자들의 가르침에 깊이 들어갔지만, 적대되는 것을 발견하면 수정하였다.” 어거스틴의 영혼에 대한 견해는 플라톤 전통에 서 있지만, 영혼 선재설, 영혼 이동설을 거부. 그의 심리 분석은 어떤 플라톤주의보다 더 깊게 들어감. 초월하는 영적 실재에 대한 견해는 플라톤과 유사성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거스틴의 접근방법은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적 토대 위에 기독교 신학의 건물을 세우고자 시도하지 않음. 그런 의미에서 철학적인 것은 어거스틴의 글에는 거의 없음. 철학 사상들은 실재에 대한 어거스틴의 영적 비전의 진리를 표현하려는 방식에 불과했음.
- 어거스틴은 “철학자들이라 불리는 모든 이들이 참된 지혜에 대한 애지자들은 아니다”라고 인식. 참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만 쉴 수 있음. 이것이 어거스틴과 중세 기독교 사상의 기본적인 확신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