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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비론 Analogy

peterpa 2009. 4. 3. 14:21

- 유비론

- 아퀴나스의 유비론이란, 우리가 단어들을 하나님에게 적용할 때, 그 단어들이 지니는 뜻에 대한 이론임. 20세기 중반 철학 논의를 지배했던 언어의 뜻과 성격에 대한 치열한 논쟁에 비추어 볼 때 시의적절함.

- 불가지론자들의 불만. 종교적 진술들에는 세속 언어에서 발견되는 것과 똑같은 검증된 의미를 넣어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종교적 발언들은 무의미하거나 희망적 생각들의 위장된 편린일 뿐이라는 것. 또한 하나님을 남성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도 문제다. 이 문제는 20세기의 문제.

 

- 하나님에 대해 의미있게 말하는 일의 문제는 이미 아퀴나스 이전에도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음. 그 문제에 대한 아퀴나스의 대답은 그 주제에 대해 신플라톤주의자들, 이슬람 학자들, 유대 사상가들이 이미 한 말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짐. 토마스의 견해는 하나님이 피조물과는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전혀 적극적/실증적인 말을 할 수 없다는 신플라톤주의와 종교 언어는 인간에게 적용되듯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단순한 문자주의의 중간을 가는 중도파 견해임. 유비론에 대한 토마스의 견해는 결코 종교 언어에 대한 완벽한 진술을 의도하지 않음. 그것은 우리가 그 말들을 하나님에게 적용할 때 갖는 의미들에 대한 일련의 관찰들 이상임.

 

- 신플라톤주의 부정의 방법 Via Negativa 다름을 강조. 아퀴나스는 한 가지 점에 동의. 인간의 언어는 잘못된 관념들에 대해서는 청소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한다면, 하나님을 계속해서 분을 내는 나쁜 성격의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결론을 그대로 밀고 나가면, 부정의 방법은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말하지 않게 되고 만다. 아퀴나스는 부정의 방법에 긍정의 방법 Via Positiva, Via Affirmativa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믿음. 우리의 신체상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귀. 하나님의 입. 하나님에게는 몸이 없기 때문에 메타포적으로 말하는 것.

 

- 아퀴나스는 우리가 말을 할 때 흔히 단어를 한 가지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혹은 두 가지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두 옵션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예를 들어, 한 가지 뜻만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의 어린양진짜 어린양? 예수님이 그런 짐승이냐? 아니다. 성부하나님. 하나님이 낳으시는 그런 분이시냐? 아니다. 만일 두 가지 뜻으로 이해해서, 어떤 말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사용하고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것. 일의적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을 시공간에 존재하는 물체로 만들어버리고, 중의적으로 본다면, 종교적 언어는 무의미해진다는 것. 그가 택한 방법이 유비적 방법.

 

- 우리가 피조물들에 대해서 사용하는 언어로밖에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그들의 원천과 원인으로 지닐 때 그 질서 덕분에 그 단어를 하나님에 대해서도 피조물에 대해서도 쓸 수 있게 된다는 것.

- 한 단어가 두 가지에 쓰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세 번째 것과의 관계 때문. 예를 들어, 식단이 건강하다. 사람이 건강하다라고 쓸 수 있음. 그것은 건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

 

- 아퀴나스에게서, 유비론은 언어의 한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며 동시에 언어가 그럼에도 유의미할 수 있다는 보장이기도 함. 유비론이란 이 두 입장 사이의 균형.

 

- 하나님 아버지’? 남성? 잃어버린 은전의 여성, 어미닭(23:37), 여성 지혜(8).

- 그리고 문자적 수준에서 서로 다른 여러 유비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조화시킬 수 없음. 어린양, 세상의 빛, 생명의 떡, 포도나무, 목자 등등.. 유비는 신적 실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줌.

 

- 유비론 격렬한 논쟁. 유비론은 무한한 후퇴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 하나의 유비를 설명하려면, 하나의 유비에서 다른 유비로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언어의 성격. 모든 언어가 그렇게 되어 있음. 그렇다면, 그런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가?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순전한 현존/임재를 만날 수 없는가? 결국 하나님의 임재는 말과 사람들과 상황과 예배 형태로 매개될 수밖에 없는 것임. 이 점에 대해 아퀴나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

 

- 종말론적 검증 eschatological verification – 죽어서 하나님에게 가서 우리의 언어를 하나님과 비교해보고 과연 그 언어가 적합한지를 볼 수 있을 것. 그 과정을 종말론적 검증이라 부름. 그러나 되돌아올 수 없음. 철학자들에게는 적합한 옵션이 아님.

 

- 존재의 유비 analogia entis.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존재의 유비. 하나님과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에 속하는 공통적 속성들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가 단순히 다단계의 피조물의 꼭대기에 이르는 존재로 격하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음. 혹자는 이것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이미지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사변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봄.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아퀴나스의 생각에서 동떨어진 것. 그의 강력한 주장은 하나님을 피조물들이 닮았다는 것은 불완전한 닮음이다. 왜냐하면 서로 공동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유비론은 존재의 사변적 형이상학의 근거로 삼을 수 없음. 창조 세계에 대한 이론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음. 세계를 만드신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만들어진 것들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있도록만드셨다는 것.

 

- 유비론은 결코 종교 언어에 대한 완벽한 기술은 아님. 토마스의 손에서가 아니라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존재에 대한 정교한 존재론이 되었음. 그것은 단어들이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어떤 종류의 의미를 가지느냐에 대한 의미론이라 할 수 있음. 그러한 이론이 없다면, 하나님에 관한 말이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알기 어려움.

 

- 어느 대사상가들이 그렇듯, 아퀴나스도 후대의 사상가들을 자극. 지난 30여년 동안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아퀴나스를 재발견하는 과정에 돌입함.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님. 아퀴나스를 훨씬 더 잘 이해하기 시작. 그의 생각들과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오늘 우리에게 도움을 줌. 아퀴나스가 말한 자연과 은혜를 프란시스 쉐퍼 식으로 대립적 분리로 봐선 안 됨. 자연은 영역 그 자체는 창조 세계 안에서 은혜의 역사인 것. 이 점을 감상할 때 계시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임. 신학대전은 철학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신학에 대한 해설임을 명심해야. 철학적 토대 위에 신학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철학을 신학의 대용물로 쓰는 것도 아님.

출처 : 청랑정
글쓴이 : 청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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