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미즘 이외의 견해들
- 크게 봐서 아퀴나스는 철학에서 경험주의 전통에 속함.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소급되며, 후대로 17, 18세기의 경험주의자들과 현대 과학에까지 이름. 이 전통은 지식 습득에 있어서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이성 그 자체는 우리에게 실재를 알 수 있도록 인도해 주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감각들이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이 입장에 서서 아퀴나스는 안셀름 및 그의 동시대인인 보나벤추라(1227-74)와 다른 입장을 취함.
- 보나벤추라는 파리에서 가르쳤던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신학자. 알바노의 추기경이 되고 곧 죽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거의 동정심이 없었음. 새로운 사고 방식에 아퀴나스보다 훨씬 덜 열려 있었음. 그는 이성의 능력에 더 높은 가치를 둠. 심지어 시간 안에서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이성이 보여줄 수 있다고까지 주장함. 반면에 신적 지식(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는 신비주의를 택함. 아퀴나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창조 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언어들을 통해서 매개된다고 가르쳤지만, 보나벤투라는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비추어주시는 신비한 조명을 강조함. 이 조명과 대조해 보자면, 모든 인간 지혜는 우매함이라는 것.
- 당시 아랍 철학자들은 의학과 수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분명 과학을 격려. 그러나 학자들이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을 더 밀고 나가기 시작한 것은 영국에서였음.
-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신학이라는 전통 분야에 덧붙여서 언어와 수학 자연과학이 연구됨. 이 발전의 핵심 인물이 토마스의 동시대인이면서 약간 더 나이 많았던 로버트 그로세티스테(Robert Grosseteste, 1175-1253). 그는 옥스퍼드에서 가르치다가 나중에 링컨의 주교가 됨. 링컨은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교구였음. 주교로서 그는 교회개혁에 헌신적이었음. 그는 1236년의 권리장전의 비준을 목격함.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했으며, 과학적 실험도 실시함. 물론 그의 자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보다는 어거스틴이나 아랍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것에 더 가까웠음.
- 또 한 사람의 13세기 지도적 사상가는 프란시스코 수도사였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대략 1214-92). 그는 흔히 그의 선배들의 의심과 박해의 대상이 됨. 그의 사상들은 파리의 감독 떵삐에흐의 정죄를 받음. 그의 견해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함. 그런 속에서 기초적인 망원경, 화약, 온도계를 만들었다고 함. 그는 세 가지 지식의 양식을 인정. 권위, 이성, 경험. 권위와 이성은 우리 감각의 경험에 의해서 확인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 경험은 외적 경험과 내적 경험이 있는데, 외적 경험은 과학 지식을, 내적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스러운 지식을 제공해 준다고 봄. 철학과 과학은 중요하긴 하지만 종속적 분야이고, 그 기능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는데 있다고 봄.
- 스코투스, 오캄, 비엘
- 중세 후기의 대 지성 중 하나가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대략 1266-1308). 스코틀랜드 출신. 거기에서 프란시스코 수도회로 들어감. 캠브리지, 옥스퍼드, 파리 대학에서 가르침. 파리 대학에서 가르치기 위해 와서 얼마 안 되어 죽음. 나중에 그는 예리한 박사(subtle Doctor)로 알려짐. 그의 성(姓)이 Duns인데 바보 얼간이, 어리석다는 dunce라는 말과 뒤섞이면서 조롱하는 말이 됨. 그렇지만 그의 가르침에는 어리석은 점이 전혀 없음.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역설을 제시. 그의 글을 이해하려면 엄청난 지적 노력이 필요한 데, 결국 그 지성이라는 것이 어리석음을 말함. 중세 신학자들이 설명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모든 논의 중에서, 스코투스의 논의가 가장 정교함. 그렇지만, 스코투스는 사랑과 의지가 지성보다 앞선다고 주장. 또한 자연적 지식에 더해서 계시의 필요성을 주장.
- 스코투스는 사색의 천재였지만, 사색을 단지 목적에 이르는 수단으로 여김. 만일 묵상 중에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함. 아퀴나스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호소했지만, 사도 바울을 우리의 철학자로 부름. 그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람들을 참으로 지혜롭게 한다고 가르쳤다고 말함.
- 그렇지만, 스코투스는 후기 중세가 보여주는 철학과 신학 사이의 넓은 간격을 보여줌. 스코투스 자신은 스스로를 우선적으로 교회의 신학자로 봄.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학적. 그의 글에서는 철학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의 분리가 나타남. 아퀴나스에게는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 스코투스에게서는 신학은 점차적으로 계시 안에 있는 초자연적 수단을 통해 우리가 믿도록 주어진 것으로 격하됨. 반면에 철학의 영역은 자연 이성의 범위 안에 드는 모든 것이 해당되게 됨.
- 이 분리의 과정은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cam, 대략 1300-1349)과 그의 독일인 제자인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대략 1420-95)에 의해서 더 진행됨. 오캄과 비엘은 비아 모데르나(via moderna 새 방법, 새길)로 알려진 새로운 사상학파의 주도적인 인물들. 그 용어는 비아 안티쿠바(via antique 옛 방법 옛길)와 의도적인 대조를 이룸. 그것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아퀴나스, 스코투스의 방법을 일컬음.
- 비아 모데르나는 유명론 전통의 연장선상에 서 있음. 물론 유명론적이라는 말이 오해가 될 소지는 있음. 유명론파란 보편자들을 거부하는데 집착했던 사상학파를 가리키기 때문. 사실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란 여러 사상 학파가 포함됨. 물론 12세기의 사상가들에게 가장 적합하긴 함. 오캄 자신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유명론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았었음.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그들의 논적들에 의해서 유명론자들이라는 이름을 뒤집어 쓰게 되었던 것임.
- 코플스톤은 그들에게 더 나은 이름을 제시하고자 함. 그들을 ‘용어론자들’(terminists)이라고 부르자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실재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그보다는 용어들의 논리적 지위와 기능에 더 관심을 기울인 새로운 운동의 논리학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들은 종합보다는 분석에 치중했고, 사색보다는 비판에 치중. 이 새 운동은 과거에 주장되었듯 극단적 스콜라주의의 파산 형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의 신학 운동으로서 중요했다는 것.
- 윌리엄 오캄은 아마도 런던 근교에 있는 오캄(Ockham)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임. 어렸을 적에 프란시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옥스퍼드에서 공부. 옥스퍼드 대학장이 그를 이단설로 고발해서 교수 면허가 막힘. 1324년 아비뇽의 교황 법정에 소환되어 자신을 변호하게 됨. 머무는 동안 청빈의 삶에 대한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견해와 교황 사이의 논쟁에 휘말리게 됨. 그는 교황이 복음서들에 모순되었으며, 따라서 참 교황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림. 1328년에 피사로 도망하여 교황의 대적이었던 황제에게 의탁함. 아비뇽을 떠난 뒤 출교되어 황제의 보호를 누리면서 황제의 궁정에 머뭄. 뮌헨에서 죽었는데 아마도 흑사병 때문인 것으로 보임.
- 오캄의 많은 분량이 저술들은 두 그룹으로 나뉨. 아비뇽으로의 도주 이전에는 신학적 철학적 작품에 헌신. 도주후에 프란시스코 수도회 및 황제에 대한 변호 및 교황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영적 권력을 남용한 것을 정죄하는 글을 씀.
- 오캄이 볼 때, 보편자들이 그냥 명칭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들이라는 실재론적 견해는 철학의 가장 큰 오류였음. 13세기와 14세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따름. 그리하여 온건한 실재론을 주장. 그것은 오캄의 말에 따르면, 어떤 식으론가 보편적인, 최소한 잠재적으로나 불완전하게 보편적인 본성이 실재로 개별자 안에 존재한다는 주장. 오캄에게 이것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웠음. 그는 보편자가 사물 안에 전혀 실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정신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 보편자들이라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정신의 추상일 뿐이라는 것. 사물을 분류하고 확인하는데 쓰는 것이라는 것. 학문이라는 것은 사물들에 대한 학이 아니라 보편자들이라 불리는 기호들과 상징들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
- 흔히 오캄이 유명론을 회의주의의 언저리에까지 밀어 부쳤다고 묘사됨. 그러나 최근 오캄 연구에 정통한 매릴린 매코드 애덤스(Marilyn McCord Adams)의 견해에 의하면, 그는 보통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철학과 신학상으로 보수적인 프란스시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는 것.
- 오캄은 천상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복받은 자들의 지식과 지상에서 그 지식을 결여하고 있는 순례자들의 지식을 구분. 순례자들에게는 자연적으로 알 수 있는 지식(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초자연적으로 알 수 있는 지식(삼위일체, 성육신)이 있다는 것. 이 구분을 강조하면서, 그는 자연적 철학과 계시 철학을 그의 선배들보다 훨씬 더 명확히 그음. 동시에 철학과 신학의 분리에 기여함.
- 가브리엘 비엘은 후기 중세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중 하나.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문예 분야를 오래도록 공부한 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보다는 오캄을 선호했던 비아 모데르나의 센터였던 에르푸르트에서 신학을 공부. 그리고 아퀴나스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존중했던 콜로뉴에서 공부. 그리하여 비엘은 비아 모데르나와 비아 안티쿠바에 다 친숙. 나중에 헌신적인 오카미스트로 남아 있었지만, 학파들 사이의 협소한 대립을 비판. 스코투스와 아퀴나스의 가르침에서도 끌어다 씀. 그의 생애 중간에 마인츠의 라인란트 시의 설교자이자 사제로 봉직. 나중에 뷔르템베르크에 가서 공동생활 형제단의 새로운 기숙사의 설립을 도움. 1484년 새로 세워진 튜빙겐 대학의 신학교수로 임명됨. 거기에서 그 대학 교수이자 학장으로 봉직. 과거 그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잘못 표현해서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오도했던 인물, 후기 중세 사상의 와해를 몰고 온 장본으로 여겨졌음.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다른 그림을 보여줌. 비엘은 중세 신학과 후기 종교개혁 가톨릭교를 연결하는 교사로 부상함. 더욱이 오캄이 그의 지적 능력을 신학상의 이론적 의문 해결에 바쳤다면, 비엘은 오캄주의를 목회에 적용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는 것.
- 철학 세계 바깥에서 오캄의 이름은 오캄의 면도날(Occam’s Razor)이라는 말로 남아 있음. 라틴어 공식: entia non multiplicanda praeter necessitatem (“entities are not to be multiplied beyond necessity”) 과학과 철학, 신학 등등에서 적용되고 있는 경제의 원칙 기본. 아이디어는 있지만, 이 특정한 문장은 남아 있는 오캄의 글 가운데서는 발견되지 않음. 또한 오캄이 이 사상을 고안해 낸 사람이 아님. 스코투스 및 여러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소급됨.
- 중세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오캄의 면도날이 때를 만난 사상이 됨. 철학과 신학이 점차로 분리됨. 이것이 근대 세속주의의 시작이 될 수도 있고, 철학과 신학의 불행한 연합이 끝을 맺고 각자 제 분야에서 제 역할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음. 말할 필요도 없이 14세기의 논쟁들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