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회의주의(Pyrrhonian Skepticism)
- 많은 면에서 개신교 신학 운동과 16세기의 합리주의는 서로 아무 상관이 없었던 두 개의 구별된 세계인 것처럼 보임. 서로 완전히 다른 문제들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 그렇지만, 어떤 연결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까지도 간과되어 왔음.
-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일어났던 관습들의 개혁이 아니었음. 종교개혁은 기독교세계의 근간을 흔든 지적 위기의 출발점임. 개혁자들의 신학은 권위의 문제, 지식의 원천의 문제, 생각의 방법들의 문제에 대한 철저한 재평가를 함의하고 있었기 때문임. 물론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외침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음. 중세에도 교회회의나 교황이나 교부들보다 성경의 권위가 우위라고 주장했던 신학자들과 개혁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구호였음.
- 그러나 성경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호소는 신학에 있어서의 지식의 문제를 새롭게 강력하게 제기함. 우리 지식의 권위와 원천에 대한 신학 논쟁들은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에 대한 관심의 부활 및 그 주제에 대한 고전 문헌들의 출간과 일치해서 일어남. 이미 1520년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면서 에라스무스는 그 문제가 모호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성경과 교회의 결정들이 허용한 한 회의주의자들의 견해를 택하겠다고 항변했음. 이 점에 대해 루터가 이렇게 대답함. “우리가 주장을 내세우는 자들이 되고 주장에 헌신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즐겨하는 자들이 되도 괜찮다.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부르실 때까지, 그대의 회의주의자들을 고수하고 학자로 남아 있으라. 성령님은 절대 회의주의자가 아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 속에 새겨 놓으신 의견에는 의심이나 단지 의견이란 것은 전혀 없고 오직 삶 자체와 모든 경험보다 더 확실하고 틀림없는 주장들만 있을 뿐이다.” 성령의 경험에 대한 루터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답변에 대해서는 상대편에서 할 말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을 것임.
- 그렇지만, 가톨릭에는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불가지론적 입장을 고수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신학적 진리에 대한 (하나님이 임명하신) 수호자로 여기는 점에서 에라스무스 편을 따른 자들이 있었음. 그들이 볼 때 성령에 대한 루터의 호소는 미심쩍으며 위험천만한 주관주의의 형태였음. 또한 “성경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성경 가운데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에서 나온다”는 칼빈의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음. 이 말은 순환논리가 아닌가?
- 콜린 브라운의 대답: 1. 그런 주장에 본래적으로 불합리하거나 자기모순적인 것은 절대 없다. 2. 그 경우의 성격상 상황은 달라질 수 없다. 말하자면 결국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역사나 지리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그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명은 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성경이 사물들이나 사람들, 사건들에 대한 믿을만한 정보를 보함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3. 그렇지만,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한다면, 그래서 이 경험이 그들의 삶에 빛과 의미를 가져다준다면, 일종의 순환논리처럼 보이지겠지만, 전제들을 결론과 혼동하는 주관적 순환논리와는 매우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적 순환은 자증(self-attesting)의 순환이다. 자증의 진리이다.
- 성경에 대한 호소는 종교개혁의 지적 위기를 촉진시켰던 가장 근본적인 쟁점이었음. 칼빈처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생각과 믿음(신념들)과 생활의 품행에 있어서 기본이었음.
- 그러나 많은 가톨릭에 남아 있던 자들은 이 점을 불안하게 느껴서 옛 길들을 그대로 고수하기로 선택함. 이 상황은 16세기 르네상스 사상가들에 의해 고대의 회의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고 회의주의적인 생각들을 그 시대의 신학 논쟁들에게 적용함으로써 강화되게 되었음.
- 고대 회의주의에 접근하게 만들어주었던 세 개의 주요 원전 = 디오게네스 래르시우스, <저명한 철학자들의 삶>, 키케로의 글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글들. 16세기 중반까지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을 잘 몰랐음. 그러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가 현대 철학의 창시자로 높여짐. 그의 사상의 재발견.
- 이 새로운 회의주의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그의 책 <피로주의 개론> (Outlines of Pyrrhonism)에서 헬라의 첫 회의주의자 피로의 사상들을 논하고 있기 때문에, 피로주의(피론주의 Pyrrhonism)이라 알려지게 됨.
- 피로 추종자들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로부터 궁극적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감각들이 믿을만한지에 대한 회의주의와 이성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임. 그의 글들 가운데서 발견한 주장들로 무장하고서, 피로 추종자들은 스콜라주의자들, 플라톤주의자들, 르네상스 자연주의자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자들, 칼빈주의자들이 말한 지식/인식 주장에 대해 공격을 개시함.
- 이성과 경험이 믿을만하지 못할 경우, 종교에는 두 가지 옵션 밖에 남지 않음. 그것은 전적인 회의주의와 신앙주의(fideism)임. 전적 회의주의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다만 공적인 질서를 위해서 교회와 국가가 만들어 놓는 관례들을 따르는 것은 괜찮다는 것. 신앙주의에 따르면, 이성과 경험을 통해서 확립될 수 없는 사상들은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 이러한 태도를 마음에 두고서 어떤 피로 추종자들은 스스로를 “크리스천 회의주의자들”이라고 불렀음.
- 피로주의는 종교 변증가들에게 무기고를 제공해 줌. 젠띠앙 헤흐베(Gentian Hervet), 장 곤테리(Jaen Gontery), 프랑소와 베론(Francois Veron, 라 플레쉐 예수회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며, 당시 데까르트가 학생으로 있었음) 등등의 가톨릭 변증가들의 손에서 소위 새로운 피로 주의가 칼빈주의를 멸망시키기 위한 새로운 전쟁 무기를 벼려냈음.
- 그러나 개신교 변증가들은 곧 동일한 무기가 가톨릭주의를 향해 사용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음. 그런 이들 가운데, 다비드- 르노 부야흐(David-Renaud Bouillier), 장 라 플라쎄떼(Jean La Placette), 영국 성공회 신부였다가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윌리엄 칠링워스(William Chillingworth)가 있었음. 그들은 가톨릭 교회가 신학적 진리의 수호자라는 주장은 그 자체가 결국 가톨릭 교회 자신의 말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줌.
- 16세기의 지도적인 피로 추종자는 프랑스 귀족 미셸 들 라 몽떼뉴(1553-92)였음. 어린 시절 그는 프랑스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독일인 가정교사에게 배웠음. 아무도 그가 라틴어를 태생어처럼 배우게 된 것으로 보임. 후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슬로건들과 어구들을 목판에 새겨 자기 서재에 두었다고 함. 그의 모토는 ‘Que scais-Je?’(께 쉐 제 – 내가 아는 게 뭔가?)였음. 몽떼뉴는 힙라적 수단으로 도달할 수 있는 확실성은 전혀 없다고 믿게 됨. 지혜는 아무에게도 결코 혜택을 줄 수 없고, 브라질의 원주민들(당시 막 발견되었음)은 자연의 귀족들이라고 주장. 또한 기독교 메시지는 오직 믿음으로 믿기 위한 무지의 개발이라고 주장. 이 극단적 신앙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몽떼뉴는 지혜로운 자의 지혜를 하나님이 멸하신다는 바울의 주장에 호소. 물론 바울이 의중에 품었던 요점은 매우 다른 것. 그렇지만, 그 당시 이 본문이 몽떼뉴의 목적에 기여함. 그렇지만 과연 몽떼뉴의 주장이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가장된 냉소적인 공격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음.
- 17세기 진정한 피로주의의 적자는 로테르담에서 철학과 역사를 가르쳤던 회의주의자 삐에르 베일(Pierre Bayle 1647-1706)이었음. 그는 명목상으로는 프랑스 개신교회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지만, 교회에 대한 그의 적대감 때문에 1693년에 교수직을 잃었을 정도. 그의 가차없는 주장은 “18세기 계몽주의의 무기고”가 되었음. 그의 유명한 작품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1695-97, 그리고 1702년에 확대개정판이 나옴)로서 일종의 인물사전, 사건 사전. 간결하게 정리하면서 회의주의적인 교훈들을 지적함.
- 좀더 온건한 회의주이자로는 프랑스의 지식인들이었던 마린 메르세느(Marin Mersenne 1588-1648)와 삐에르 가센디(Pierre Gassendi 1592-1655)이 있음. 둘 다 성직자들. 가센디는 철학교수. 나중 1645년 파리에서 수학교수가 됨. 초기 작품에서 사물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나중에 좀더 온건한 회의론으로 수정함. 우리가 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인정. 그러나 아무리 회의주의자라도 뭔가 현상에 대해서는 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가센디 자신의 우주론은 에피쿠로스의 모델에 기초한 일종의 원자론 형태.
- 가센디의 절친한 벗이었던 마링 마르세느는 데까르트의 평생의 친구이기도 했음. 데까르트와 함께 라 플레쉐의 학생이었었음. 이론적으로 그는 피로 추종자였지만, 엄격한 회의론을 실천에 옮겨 적용하지는 못함. 물리학으로 확실한 것이 있음을 증명할 수 없음을 인정. 빛의 원인과 같은 것도 설명할 수 없다고 봄. 수학의 진리들도 조건적이라는 것. 과학의 업적이라는 것도 흔들림없는 형이상학 체계에 의존해 있지않다는 것. 과학이 진정한 세계에 대한 참되며 절대적인 그림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과학은 혼란없이 형이상학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것.
- 이렇게 해서 피로주의적 회의론은 반대급부로서 합리주의로 하여금 우주의 배후에 있는 합리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추구를 합리주의의 아젠다로 설정하도록 만들게 됨. 그러나 피로주의의 회의론은 또한 경험주의의 아젠다를 설정해 주었음. 경험주의는 합리주의의 오류를 바로잡고 지식/인식의 문제에 의해 제기된 의문들에 대해 더 나은 답변을 추구하게끔 만듦.
- 이신론(Deism 자연신론) 역시 부분적으로는 피로주의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라 볼 수 있음.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정통 기독교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함. 이신론은 합리적인 관념들에 근거해서 또한 미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종교에 대한 합리적인 진술을 제시하려고 노력함. 파스칼의 생각은 기독교 정통주의의 대안적 형태라 할 수 있음. 파스칼은 과학과 신앙이라는 각각 분리된 영역에 제 몫을 인정해주려는 시도.
- 그러나 17세기를 음미하려면, 당시에 일어나고 있었던 과학혁명과 그 일에 개입하고 있었던 철학자들의 견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