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아르미니우스와 도르트 회의
아르미니우스와 도르토 총회
- 그런 와중에, 기본적으로 똑같은 논쟁이 개혁파 교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음. 그 논란은 화란의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의 가르침에 집중되어 있었음. 아르미니우스는 1587년 암스테르담에서 목회하도록 청빙을 받기 전까지 말부르그, 라이덴, 제네바, 바젤, 파두아, 로마 등지에서 두루 공부했던 학자였음. 1603년 그는 당시 공석이었던 라이덴 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임명됨. 그곳에서 그는 엄격한 칼빈주의자였던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1563-1641)의 반대에 부닥침. 일찍이 아르미니우스가 펴낸 그의 로마서 연구 때문에 그는 펠라기안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됨. 펠라기안주의에 대한 비난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또한 소시니우스주의자라는 비난이 덧붙여짐.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남은 평생 그 논쟁에 휩싸였지만 그 비난에서 빠져나감.
- 아르미니우스는 화란 개혁 교회의 두 개의 주요 신앙고백서인 벨직 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의 개정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남. 그의 죽음 후에,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이 아르미니안 신조 혹은 항의서(Remonstrance)라는 이름의 간단한 문서로 제출됨(1610). 엄격한 칼빈주의의 결정주의적인 논리에 반대해서, 항의파는 수정 칼빈주의를 제시함. 이중예정론의 자리에 항의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구원에 결정적인 요소로 삼음(조항1). 요한복음 3:16과 요일 2:2에 호소하면서 항의서는 보편속죄, 보편구속론을 가르침. 물론 유효하게 되기 위해서는 믿음에 의해 받아들일 것이 요구된다고 말함 (조항2).
인간은 구원의 은혜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며, 그들에게는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중생이 필요하며, 선을 이해하고 생각하고 의욕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조항3). 인간은 “선행하는, 보조적인, 일깨워주는, 후속적인, 그리고 협동적인 은혜”를 필요로 하지만, 은혜는 “불가항력적이 아니라고” 주장 (조항4). 신적 은혜는 사탄이나 어떠한 권세도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는 일을 예방하기에 충분하지만(요10: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 (조항5).
-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한 반대는 먼저 고마루스가 시작. 그런데 아르미니우스파가 스페인에게 동조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이 일면서 문제가 더 복잡해짐. (역사적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그로부터 독립하려는 힘든 전쟁을 통해 벗어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던 때였음).
- 1618-1619년에 도르트레히트에서 도르트 총회가 신학적 쟁점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됨. 주로 화란의 신학자들이 모였지만, 여러 나라들의 개혁 교회들의 대표들이 참석함. 결과. 아르미니우스파에 속한 2백명의 목사들이 목사직을 박탈 당함. 그리고 휴고 흐로티우스(Hugo Grotius)는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서 종신형이 언도됨. 그의 아내가 책 상자에 그를 숨겨 피신시켜 파리에 정착함. 그러나 반 올덴바네벨트(van Oldenbarneveldt)는 반역죄로 처형당함.
- 신학적인 면에서 도르트 총회는 지속적인 의의를 지님. 벨직 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담이 재확언됨. 다섯 가지의 주요 교리로 도르트 신경이 채택됨. 정통 칼빈주의 입장. 첫번째로 예정 문제, 택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택(우리 안에 선택의 근거가 없고 우리의 믿음조차도 선택을 시발시키지 않는다)과 이중예정(‘유기’의 작정이 악한 자들에 대한 정죄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지 않다)을 다루고, 두번째로 구속과 속죄 문제를 다룸. 구속은 유효하며, 속죄는 제한적이라는 것(제한속죄론). 그리스도는 오직 택자를 위해서만 죽으셨다. 세번째와 네번째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즉 전반적인, 전체적인 타락으로서 죄가 모든 인간행위들과 정서에까지 확대되었다는 것. 불가항력적 은혜는 하나님이 구원의 유일한 저자이시며, ‘믿을 의지와 믿는 행위도’ 낳으신다는 것. 다섯번째는 성도의 견인론으로서, 참으로 중생한 자들은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견뎌낸다는 것. 도르트 신경의 주장들은 항의서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진술되었으며, 각 요점마다 성경의 지지를 달아놓고 있음.
- 오늘날의 신학논쟁과 관련해서, 찰스 하트숀과 같은 과정신학자들은 전능, 전지와 같은 개념들은 커다란 신학적 오류라고 주장. 그리고 전통적 유신론보다 과정철학/과정신학이 더 나은 옵션이라고 주장 (Hartshorne, Omnipotence and Other Theological Mistakes, NY University Press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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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중간지식 사상이 오늘날 좋은 옵션이라고 주장. 여기에 복음주의자도 몇이 포함됨. (William Lane Craig, The Only Wise God: The Compatibility of Divine Foreknowledge with Human Freedom, Baker, 1987; The Problems of Divine Foreknowledge and Future Contingents: From Aristotle to Suarez, Brill, 1988).
- 그러나 20세기 도미니꼬 철학자인 가리주-라그랑제(R. Garrigou-Lagrange)는 몰리나의 중간지식 이론이 내적 모순이 있다고 지적함. “중간지식은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지키고자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간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 본성상 행위를 할는지 안할는지 비결정상태에 있는 단초가 실제로 생동할 것이라고 볼 수 있느냐? 그 단초에 대한 아무리 포괄적인 지식을 갖는다 해도 그 안에서 그곳에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볼 수는 없다. 만일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 자유로운 의자가 놓여 있는 상황들을 통해서 이 결정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결정론으로 끝나고 만다. 상황들을 미리 봄으로써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 조건과 무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R. Garrigou-Lagrange, God: His Existence and Nature; Brian Davies, Thinking about God, 1985).
- 그러나 몰리니스트들의 ‘중간지식’이론이 결정론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제네바와 로마의 어거스틴 계열의 정통주의 역시 결정론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현대의 결정론을 어거스틴에게까지 추적해 들어가고 있는 루카스(J. R. Lucas)의 견해가 그렇다 (J. R. Lucas, The Freedom of the Will, Oxford, 1970). 루카스 자신의 해결책은 전능함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능을 제약하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대해 독립적인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틀림없는 지식, 전지하심을 제한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계심에 틀림없지만, 전지하심을 통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한을 두신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지식을 통해서 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유신론자 입장에서 보기에 루카스의 견해는 펠라기안주의를 이신론적으로 재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 이보다 더 나은 제안은 피터 기치(Peter Geach)의 견해. 그는 자기의 견해가 아퀴나스의 견해와 같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정론과는 다르다고 주장. (Peter Geach, Providence and Evil, Cambridge, 1977). 아퀴나스처럼 기치는 하나님이 미래를 통어(controlling)하심으로써 미래를 아신다고 봄.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미래를 결정되어 있는 신적 작정을 통해서 통어하지 않고 세계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심으로써/개입하심으로써 통어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마치 체스 판에서 다른 선수들이 움직이는 것과 상관없이 그런 작전에도 불구하고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나사길 수 있는 최상의 체스 선수와 같이 행하신다고 봄. “하나님은 최고의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로서 만물을 자기의 통제 아래 두고 계신다. 어떤 선수들은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돕고 있으며, 어떤 선수들은 그 계획을 방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한한 선수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계획은 집행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플레이는 다양한 노선이 있어서 유한한 선수들의 다양한 움직임에 대응하실 것이다. 하나님에게 뜻밖의 것이 있다거나 움츠려든다거나 속임수를 당한다거나 실망하는 경우는 없다. 체스의 대가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실 수 있다… 유한한 선수들이 어떤 수를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수를 생각해서 대처하게 만들 수는 없다. 이미 하나님은 장기판의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읽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대처하게 만들지를 못한다.”
- 신학에서 몰리나와 아르미니우스가 제기한 문제들은 17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인들을 양분해 왔음. 장로교 전통은 도르트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감리교 전통은 대체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수용해왔음. (오늘날의 알미니안입장- Clark H. Pinnock, ed., Grace Unlimited, Bethany, 1975; Pinnock, ed., The Grace of God and the Will of God, Zondervan, 1989; 개혁파 입장- Packer, “Arminianisms,” in Robert Godfrey and Boyd III, eds., Through Christ’ Word: A Festschrift for Dr. Philip E. Hughes, P&R, 1985; Paul Jewett, Election and Predestination, Eerdmans, 1985).
- 그러나 이 논란에 뛰어들지 않고 바깥에서 볼 때, 양측의 주창자들은 성경에 자기들의 사상 시스템을 집어넣어 읽고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사랑의 힘의 작용으로가 아니라 물리적인 힘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음.